가을이 오는 길

2024-09-26

김길웅, 칼럼니스트

팔 불뚝거리던 것도 한때, 이제 젊은 날의 혈기를 거두고 앞뒤에 눈을 줄 때다.

여름이 긴 시간이 아닌 걸 실감한다. 기분에 끌리면 길고 지루하지만 끝은 있다. 덥다고 투덜대던 게 엊그제인데 그새 햇볕이 여리고 바람이 산산하다. 언제 와 있던 걸까. 창틈으로 낯선 한기가 스멀거리며 들어온다. 새벽엔, 잠결에 홑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고 있었다.

가을이다.

가장 민감한 게 낙엽수, 그중에도 감나무다. 그끄제 비가 추적이는데 감나뭇잎 여남은 개가 마당으로 내려앉았다. 소년의 손만 한 것들. 잎이 공중을 한 번 구르더니 낙하한다.

무풍한데 낙엽이라니. 심록의 잎도 계절 앞엔 인연을 놓아야 하는가. 왤까. 정원에 노상 오던 새들의 방문도 뜸하다. 열매 한 톨 없는데다 궂은 날씨가 그들의 내왕을 흐지부지하게 했을까.

지금쯤 어느 들판 덤불숲에 몸을 부렸을 테다. 산머루며 산포도 찔레가 널려 있을 것이고, 민가에서 멀지 않아 사람 들끓는 휴양림에도 때죽나무 산뽕나무 열매가 거무숙숙 익었으리라. 새들, 나무 열매를 먹으며 숲에서 난 가을이 오는 길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색색으로 단풍 든 숲 저쪽으로 난 가느다란 길, 산모퉁이 돌아 계곡을 지나 산등성마루 타고 절정을 향해 오르는 가파른 그 길. 고기비늘만 한 느릅나무 잎들이 시들면서 여름을 걷어내고 섬세한 가지들이 드러나기 시작이다. 그물처럼 가을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석류나무, 앵두나무, 단풍나무들이 잎을 밀어낼 채비를 서두르는 게 빛깔에서 읽힌다.

마당을 서성이다 옥상으로 오른다. 옥상에 올라 바라본 바다와 하늘과 산. 바다와 산의 경계, 육지와 섬으로 그어놓은 수평선이 어머니의 가르마처럼 선명하다. 산은 봄에서부터 누적돼 온 여름의 무게를 털어 내며 비만 탈출을 선언한 걸까. 헐거워진 듯 가벼워진 듯 그러나 더 듬직한 가부좌에 산이 더 커 보인다.

눈앞의 생명들이거나 생명 아닌, 모든 것들이 높은 언덕에 올라 여름이 사라져간 소실점에 멎었던 눈을 저 들녘 너머 보낸다. 연무 낀 모퉁이를 에돌아 난 가을이 걸어 오는 길이 언뜻언뜻 보인다.

가을은 겨울로 가는 간이역. 눈 깜빡할 새에 지나친다. 많은 것들이 생의 절정을 내려놓으려 숨을 고르고 있다. 나도 가을 속으로 속도를 줄이려 한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 나앉아 지는 것들의 고독과 만나도 보아야 한다.

가을은 그것들의 아픔, 그것들의 쓸쓸함도 함께할 수 있어야 하는 계절이다.

어쩌면 좋은가. 어느새 삶을 정리할 계제에 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쓰는 것 하나뿐. 글쓰기에 빠져 지낸다. 병색 문학이다. 살아온 일, 살아가는 얘기, 또 살아내야 할 미래의 꿈을 필설로나마 서술할 수 있으면 좋겠다. 화려한 필체라야 할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힘들다. 내 얘기를 털어놓되 독자에게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가을은 언제나 중후한 표정을 지어가며 내 나이의 느긋한 걸음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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