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구매자

2025-03-19

하버드 경영대 석좌교수 마이클 포터에 따르면, 국가의 특정 산업의 성장과 경쟁력은 그 산업과 관련된 네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첫째, 산업 내 경쟁과 관련된 요소들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작동하는지, 둘째, 그 산업의 바탕이 되는 인프라 등의 투입 요소가 충분히 구축돼 있는지다. 농업을 기준으로 보면 농지 정비, 관개(灌漑) 고도화, 도로망 구축 등이 포함된다. 셋째는 해당 산업과 연관된 산업들의 경쟁력 수준인데, 농업은 종자 산업, 물류 및 유통산업, 식품 제조업 등의 경쟁력이 이에 해당된다. 높은 경쟁력으로 자주 언급되는 네덜란드 농업의 발전은 자국 종자 산업 및 항만 물류업의 경쟁력과 큰 연관이 있다.

농업 정책, 생산자 보호에 치중

글로벌 경쟁서 일본 등에 밀려

소비자 위한 정책 투입 늘려야

넷째는 수요 조건, 즉 해당 산업의 결과물에 대한 시장의 크기와 질이다. 농업과 관련하여 국내 수요 조건을 보자면, 우리의 시장 크기는 대체로 작고, 시장의 수준은 예컨대 토마토·딸기·소고기·돼지고기 등은 상대적 세련된(sophisticated) 시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지만, 감자·사과·쌀 등의 시장 세련도 수준은 낮다. 저렴한 가격이 여전히 가장 큰 경쟁력이다.

수요의 질을 결정하는 ‘세련된 구매자’는 일반적으로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구매자를 의미한다. 세련된 구매자층이 두터울수록 공급 산업은 지속적인 혁신 추구와, 경쟁적으로 더 높은 품질의 제품을 개발하여 산업 전반의 기술적 발전과 품질 향상을 촉진한다. 세계경제포럼에서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경쟁력 지표 중 상품시장 효율성을 평가하는 항목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정부는 무릇 산업의 경쟁력을 이끄는 이 네 가지 요소에 다양하게 관여하며 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토록 돕는다. 우리 농업에서의 큰 흐름으로 보자면, 1960~70년대에는 농업 관련 인프라에 많은 투입이 있었다. 토지·관개 및 도로 정비 등 농업 생산과 관련된 여러 투입 요소를 고도화하는 정책적 투입이 주를 이루었고, 획기적인 생산성 확대라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후 우리 농업 정책 투입의 핵심 방향은 주로 산업 내 경쟁의 강도를 낮추고 보호하고자 하는 쪽이었다. 수입 농산물이 국내 시장에 들어와서 경쟁이 격화되는 것을 막고, 외부의 자본이 들어와 기존 산업의 구조가 바뀌는 것 또한 막고자 했다. 또한 연관 산업인 유통 및 물류업, 식품 제조업 등의 교섭력이 농산업의 내부 경쟁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정책적으로 제한해왔다. 더불어 산업 내에서 생산자들이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을 막고 유지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인프라 요소에 대한 투입과 농업 내 경쟁 요소에 대한 제한이 핵심인 우리 농정의 방향은 꾸준히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 현시점 우리 농업이 글로벌한 경쟁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는 답을 하기 어렵다면, 지금까지 추진해 온 농업 정책의 주요 투입 방향의 조정이 필요하다.

농업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 중에서 미국이나 호주처럼 초거대 생산을 하진 않지만 앞서 나가고 있는 국가들, 예컨대 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일본 등과 같은 국가들은 농업 경쟁력 관련 네 가지 요인에서 우리와 유독 다른 점이 보인다. 농산물 관련 수요의 규모가 우리보다 크고, 세련된 수요층이 더 두텁다. 우리도 수요에 대한 정책적 투입을 적극적으로 할 때가 되었다. 지금껏 정책 투입의 대상이 주로 공급 측, 즉 농업인·생산자였다면, 이제는 농업이 생산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와 기업에 대한 정책적 투입을 늘려야 한다. 요컨대 농산물 수요의 규모를 키우고, 수요의 질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면 이를 바탕으로 우리 농업이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 포터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가본 적이 없었던 길이다.

프랑스 농업이 가격 경쟁력에서 미국·호주 등에 밀리지만 강력한 농업 선진국인 것은 프랑스 소비자의 미식 성향에 기인한다. 즉, 세련된 구매자층이 두텁다. 저렴한 농산물 시장과 고급 시장이 고루 존재하고 있고, 구매자는 취향과 용도에 따른 차별화된 구매를 한다. 많은 생산자가 가격 경쟁력에만 몰입하지 않고, 특색 있는 농산물을 고객의 필요에 맞게 생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일본은 지역 식품 제조사들이 지역 특유의 농산물을 활용하여 다양한 식품을 경쟁력 있게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알아주는 질 높은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이탈리아 농업경제학 교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탈리아 소비자들은 강 이쪽 편 나무에서 열린 올리브가 강 건너편의 올리브와 결코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단순히 가격으로만 비교하지 않죠. 이게 우리 농업의 원동력입니다.” 우리 농업에도 두터운 세련된 구매자층이 필요하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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