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톱이 자라듯이 매일이 밀려드는데 안 잊을 재간이 있나."
한번 보기 시작하니 정주행을 멈출 재간이 없다. 풍경 좋고 사람 좋은 제주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각양각색 반짝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혼이 홀딱 빠진다. 다음 화를 누를 때마다 쳐들어오는 요망진 매력에 당최 빠져나갈 수가 없는, 멜로물 이상의 인생작 '폭싹 속았수다'다.

"'노 땡큐' 한 시절, '노 빠꾸'의 그들이 있었다."
◇제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생 파노라마...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서 태어난 반항아 애순(아이유·문소리)과 그를 쫓아다니는 순애보 관식(박보검·박해준)의 일생을 총 4막에 걸쳐 풀어낸 넷플릭스 시리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흘러가는 사계절의 풍경 속에서 광례(염혜란), 애순, 그리고 금명까지 3세대에 걸친 모녀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어렸을 때부터 박복한 팔자를 자랑하던 광례는 자신의 첫째 딸 애순을 목숨보다 아낀다.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해녀를 하며 전복을 캐던 광례는 숨병(깊은 물속에서 잠수를 했을 때 체내에 남아 있는 질소가 고통을 유발하는 병)에 걸리고 결국 29세에 요절하게 된다. 이에 아빠에 이어 엄마도 병으로 잃게 된 애순은 혼자가 되지만 항상 그 곁을 무쇠같이 지키는 관식에게 위로받는다.
꿈을 꾸는 계절이 아닌, 꿈을 꺾는 계절을 마주해야 했던 애순과 관식은 사랑 앞에 각자의 진로를 포기한다. 운동을 하던 관식은 금메달 대신 딸 금명을 얻고, 애순은 대학 진학 대신 고된 시댁살이를 시작한다. 시종일관 관식에게 "섬 놈에게 시집가지 않겠다"며 울부짖던 애순은 그렇게 제주에서 정착해 자식들을 키워내고, 또 그의 그늘에서 큰 자식들은 육지로 나가 물질보다 험한 현실과 마주한다.

"엄마가 가난하지. 니가 가난한 거 아니야. 쫄아붙지마. 너는 푸지게 살아."
◇엄마가 딸에게, 그리고 엄마가 된 딸이 또 딸에게 = 가슴 먹먹한 인물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폭싹 속았수다'는 그중에서도 세 모녀의 관계성을 통해 당시 가혹했던 사회적 배경을 보여준다. 아무리 공부 잘하는 딸이 있어도 집을 말아먹은 장손을 먹여살리기 위해 대학 대신 땜질 공장에 보내던 시절, 커플이 야반도주를 하면 남자는 호기롭다며 넘어가지만 여자는 풍기문란으로 퇴학당하고 혼담까지 엎어지던 사회는 세 여성들에게 잔혹하게만 다가온다.
관련기사
- "한국인 관광객, 일본 여행 가서 ‘나라 망신‘"…쓰시마 논란에 서경덕 ‘분노‘
- ‘끊이지 않는 논란‘ 백종원, 주주에 사과…"뼈저리게 반성, 회사 원점 재점검"
- ‘에드워드 리‘ 이름 걸었다더니 대박났네…"1주일 만에 10만개 팔렸다"
- "정수기 물맛 왜 이래" 알고보니 ‘폐수‘였다…5년간 마신 中 여성은 지금
하지만 '폭싹 속았수다'의 광례, 애순, 금명은 박복한 운명 속에서도 단단하게 살아간다. 그 원동력은 모녀가 대대로 물려준 자산인 '자존감'에 있다. 광례는 죽기 전 자신의 딸만큼은 가난해도 고개 숙이지 않고, 여자라고 흉 보이면서 살지 않길 바라며 애순을 있는 힘껏 애정한다. 이 과정은 곧 애순의 자존감으로 이어지고 애순의 딸인 금명의 마음속에도 깊은 뿌리로 자리 잡는다.
남편을 두고도 지게 질 팔자라며 온 가족을 먹여살린 광례, 고된 시댁살이 속에서도 자식들만큼은 손해 보는 일 없도록 아끼며 살아가는 애순, 그리고 영범(이준영)과 약혼 과정 중 밀려오는 예비 시어머니의 독설에도 할 말 다 하는 금명까지. "상 차리는 사람 되지 말고, 상을 막 다 엎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애순의 말처럼 무던하고도 굳세게, 앞길을 걸어나간다.

"아니다 싶으면 빠꾸. 수틀리면 빠꾸. 아빠한테 냅다 뛰어와, 알지?"
◇우리가 나무가 될 때, 시들고 있었던 이들을 향한 '러브레터' = '폭싹 속았수다'는 딸과 엄마의 사랑 이외에도 부녀지간의 정, 형제지간의 우애, 친구들과의 의리 등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형태의 사랑들을 다룬다. 작지만 깊은 호의,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당연하지 않았던 애정들이 유년기의 양분으로 자리 잡기까지 있었던 모든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주며 애달픈 마음을 끌어내고 눈시울을 붉힌다.
나아가 '폭싹 속았수다'는 단순히 시청자들을 울리는 것을 넘어 진정 소중한 것에 대한 깨달음을 전한다. 울고 웃고, 상처 주기도 받기도 하며 성장하는 우리네 인생 속에서 서로보다는 서로의 사이에서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만을 미워하길 바라는 마음이 화면을 넘어 전해져온다. 그리고 그 그 미움은 우리가 흘리고 있는 1분 1초가 서로를 떠나보내고 있는 시간임을 깨닫게 하고, "있을 때 잘 해야지"라는 쉽지만 잦지는 않았던 결심을 다부지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