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92화. 천고마비

2025-08-31

‘하늘이 높다’는 말 속에 숨은 하늘과 땅의 개념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가을을 가리키는 말로 많이 사용되었죠. 이는 여름의 습기가 물러나면서 구름이 걷히거나 더 높아 보이면서 하늘이 더욱 푸르고 맑게 느껴지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있습니다. 하늘이라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공간, 어떤 경계도 없어요. 푸르고 맑게 보인다고 해서 하늘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왜 ‘하늘이 높다’고 말하는 걸까요. 여기엔 우리네 조상을 비롯하여 동양 사람들이 생각한 하늘과 땅의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중국에서 세상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며 평평하다고 했어요. 하늘이 세상을 덮은 둥근 덮개이기에 ‘하늘이 높다’라고 표현한 것이죠. 하늘이 덮개라는 표현은 세계 각지의 신화에 등장합니다. 유대교 경전(기독교의 구약)에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물과 물 사이에 나누게 하시니’라는 대목이 있죠. ‘궁창’은 단단한 금속판 같은 덮개로, 유대인들은 그 위에 하늘의 바다가 있다고 여겼어요. 덮개에 구멍이 생길 때 비가 내린다고 말이죠.

이집트에는 땅의 신 게브가 누워있고, 하늘의 신 누트가 팔다리로 바닥을 짚고 둥글게 둘러싼 벽화가 자주 나옵니다. 누트의 몸에는 별이 새겨졌고, 그 위를 태양의 배가 지나가면서 하늘이 둥근 천정이라고 표현하죠. 하늘의 덮개에 대한 상상은 지역마다 다채롭습니다. 몽골에서도 하늘을 거대한 천막 ‘유르트’라고 여기며 유르트 중앙의 둥근 환기창을 태양과 달, 별이 드나드는 길이라 생각했어요. 이처럼 세상의 모습은 상상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죠.

특이한 것은 이집트처럼 하늘이 단순한 덮개가 아니라 하나의 신이라고 여긴 신화가 많다는 겁니다. 마오리 신화에서도 하늘인 랑이와 땅의 여신 파파가 껴안고 있어 세상이 깜깜했는데, 자식들이 둘을 갈라놓았다고 해요. 지금도 랑이는 파파를 그리워해서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이 바로 비입니다. 마오리족이 사는 오세아니아 반대편 그리스에도 비슷한 신화가 있죠. 태초의 혼돈, 카오스에서 땅의 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태어났어요. 둘은 항상 붙어있었기에 자식들은 가이아의 배 속에 갇혀 빛을 보지 못했죠. 이에 아들 크로노스가 어머니의 부탁으로 우라노스를 낫으로 공격해 떼어놓으며 하늘과 땅이 서로 떨어져 세상이 생겨납니다.

마오리와 그리스, 둘의 생활은 완전히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바다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었죠. 어쩌면 닫힌 공간인 땅을 벗어나 끝없이 펼쳐진 바다로 뻗어간 경험이 ‘닫힌 세상이 열렸다’라는 이야기로 연결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놀라운 것은 신화에서 ‘하늘이 우라노스의 덮개’라고 말한 그리스인들이 일찍부터 ‘둥근 지구’를 알았다는 점입니다. 지중해를 무대로 살아간 그리스인들은 곳곳을 항해하며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산이 꼭대기부터 조금씩 보이는 모습을 목격했어요. 동시에 멀리 다가오는 배가 돛부터 보이는 장면을 통해 ‘땅이 평평한 게 아니라 둥글다’라는 것을 체감했죠.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를 더욱 발전시켰어요. 세상을 수학으로 설명하려 했던 피타고라스학파는 둥근 구체를 완전한 형태로 간주하며 대지가 둥글다고 생각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 때 달에 드리운 그림자를 통해 ‘지구는 둥글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에서 시작한 둥근 지구에 대한 상상은 콜럼버스의 항해로 이어지죠. 근대에 이르러 이들이 동쪽으로 밀려왔을 때, 중국은 새로운 세계관과 충돌합니다. 나침반·종이·화약처럼 세상을 발전시킨 온갖 발명품이 나온 것처럼, 중국은 기술력이 뛰어나고 세상을 이해하는 나라였어요. 하지만 좁은 땅에 살며 바다 너머의 둥근 지구를 상상한 그리스인과 달리, 넓은 땅에 살아온 중국인은 끝없이 평평한 대지를 당연히 여겼습니다. 어떤 이들은 중국인이 ‘중국이란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하죠.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천지현황(天地玄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라는 표현이에요. 사람들은 대개 몽골의 텡그리처럼 ‘하늘을 푸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하늘은 검다’라고 말할까요. 이는 중국인들이 하늘을 끝없는 공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을 보면서 푸른 하늘이 단지 하늘의 한 모습일 뿐이며, 그것이 단순한 덮개가 아니라 이 뒤에 세상의 진리가 있다고 여겼죠. 현(玄)이라는 한자는 검은색을 뜻하지만, 동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근원’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천지현황’이라는 말은 단순히 색깔이 아니라, 하늘이 끝없는 근원임을 상징하죠. 이처럼 중국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 너머를 생각하는 상상의 힘이 있었습니다.

‘천고마비’라는 말도, 단순히 ‘하늘이 높다’만 뜻하지 않습니다. ‘말이 살찐다’라는 말은 가을의 풍요 그 이후의 미래를 이야기한 것이죠. 박지원의 『연암집』에도 나오지만, 이는 ‘북방 유목민이 침입할 테니 주의하라’라는 뜻입니다. 여름 동안 목초를 잔뜩 먹고 살찐 말을 타고 가을의 수확을 노려 침공할 것이라는 이야기죠. 나아가 이러한 시련을 극복한 뒤에 찾아올 혹독한 겨울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 가을은 독서와 사색의 계절이기도 하죠. 천고마비라는 짧은 말에서 다채로운 가능성을 떠올리듯, 여러 글을 보며 가을 하늘처럼 넓고 높은 생각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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