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분석이 한국 사랑의 길”…국제 한국학 원로의 고언

2024-09-23

세계 한국학의 3세대 등장: 2세대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지난 9월 13일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는 특별한 모임이 있었다. 1984년 이후 40년간 하버드 대학의 한국학 프로그램과 한국연구소를 이끌면서 발전시켜 온 카터 에컬트(Carter J Eckert) 교수의 은퇴를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전 세계에서 에컬트 교수의 제자와 동료 교수 4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찌 보면 한 교수의 은퇴를 축하하는 단순한 자리였다고 할 수 있지만, 세계 한국학과 한국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행사였다. 세계 한국학의 시작을 알린 1세대에 이어 세계 한국학을 중국학이나 일본학의 아류가 아닌 국제지역학의 한 분야로 우뚝 서게 했던 2세대가 현역에서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카터 에컬트, 브루스 커밍스 등 2세대 한국 학자들 속속 은퇴

중국학과 일본학 그늘에서 벗어난 독자적 지역학 위상 구축

은퇴 에컬트 하버드대 교수 “어렵더라도 자료 포기하지 말라”

서구와 다른 근대화 과정 관심…‘식민지 근대화론’ 연관 논란도

세계 한국학 1세대

세계 한국학의 1세대로 유럽에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교수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 Wagner) 교수와 제임스 팔레(James B Palais) 교수가 있었다. 세 학자는 모두 조선시대 연구자로 도이힐러 교수는 여성 지위의 관점에서, 와그너 교수와 팔레 교수는 신분제도와 실학사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근대 이전 한국의 역사를 밝히고자 했다.

1세대 연구는 한국의 연구자와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와그너 교수는 족보와 과거시험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의 신분이 4개로 고정되어 있었으며, 조선의 양반이 고려시대의 귀족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를 신분제보다는 근대적 성격을 갖는 관료제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한국 역사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팔레 교수의 조선시대에 대한 분석은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팔레 교수는 신분별 인구 분석을 종합해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였다. 아울러 고정된 신분제, 중앙집권적이지 못한 왕권제, 그리고 중국의 보호로 인해 500년 동안 발전하지 못한 정체 사회로 분석했다. 실학에 대해서도 그 자체가 가진 고대 한당유학(漢唐儒學)적 특징을 강조했다.

2세대 커밍스가 준 충격

팔레 교수의 분석은 중국·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특징을 찾음으로써 중국학과 일본학의 아류에 머물러 있던 미국에서의 한국사가 ‘홀로서기’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근대’의 관점에서 볼 때 부정적인 특징을 부각함으로 인해 한국의 역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팔레의 제자이자 고려시대 연구자였던 존 덩컨(John B Duncan) 교수(UCLA)는 “특징을 찾는다는 게 ‘하필’ 부정적인 것만 찾아서 오해를 만들어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1세대 학자들의 노력은 에컬트 교수와 마이클 로빈슨(Michael Robinson) 교수(인디애나 주립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교수(시카고대)로 이어졌다. 1세대 학자들이 주한미군과 관련 있었다면, 2세대 학자들은 주로 1970년대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서 거주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2세대 학자 중 한국에 먼저 알려진 학자는 커밍스였다.

그가 출판한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학계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주지하듯이 커밍스의 연구는 한국현대사 연구의 주류를 수정주의로 바꾸어놓았다. 마침 이 책이 나오는 시점에서 한국에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이 출간되었다. 수정주의는 베트남 전쟁 이후 세계적으로 약소국의 독립운동을 억압했던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관점이었다.

에컬트와 식민지적 근대성

커밍스가 한국 학계에 준 충격은 지대했지만, 세계 한국사학계에 더 큰 영향을 미친 학자는 에컬트였다. 그의 연구 경향은 커밍스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에컬트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좀 더 관심을 가졌다. 팔레의 입장을 계승하여 조선시대 내에서 서구식 근대화의 씨앗을 찾는 것보다는 서구 자본주의와는 다른 한국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 에컬트의 입장이었다.

에컬트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국에 민족주의적 입장이 필요했지만, 이런 입장이 다른 한편으로 한국 역사를 분석하는 객관적인 관점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민족주의 관점에서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주관적 평가가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에컬트는 서구와는 다른 한국적 자본주의의 기원을 찾기 위해 식민지 시기 한국적 기업의 탄생과 활동을 분석하였다.

그의 연구는 동료들에 의해 ‘식민지적 근대성’이라는 연구로 연결되었다. 로빈슨과 신기욱 교수(스탠퍼드대)가 에컬트 교수와 함께 주도한 ‘식민지적 근대성’은 서구와는 다른 방식의 한국적 근대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이 그렇듯이 1945년 이후 현대 한국 사회가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구조를 갖게 된 그 역사적 근원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한국 자본주의, 서구 잣대로 보지 말라

에컬트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적 근대성’ 연구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한국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해외 한국사학계의 대부분 연구는 식민지 시기 연구에 집중되었다. 국내에도 2000년대 이후 역사학계와 문학, 그리고 문화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던 보이’라는 개념 역시 ‘식민지적 근대성’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에컬트는 국내에서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과 연결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근대의 기원을 일본 제국의 영향에서 찾고자 했고, 에컬트와 그 동료들의 책이 낙성대 연구소와 관련된 경제사학자들에 의해 번역되거나 인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 역사학의 비판적 입장에서 초기에는 에컬트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국내의 학자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에컬트를 비롯한 2세대 학자들의 생각은 일본 제국의 통치를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긍정이나 부정의 평가가 들어가는 순간 역사에서 ‘객관’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서구와 달리 시장과 노동에 대한 강한 국가의 개입이 있었던 한국적 현상에 주목하고자 한 것이었다.

램지어 교수에 대한 일갈

최근 박정희에 대한 저서를 출간한 것도 긍정 또는 부정의 평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적 근대가 박정희에게 어떤 방식으로 체화되었고, 이후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한국사회에서 외화되는 모습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학문적 결과가 일부 국내 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는 점도 인식하였다. 팔레와 함께 2세대 학자들은 경제성장과 산업화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억압되었던 노동의 역사도 함께 바라보았다.

에컬트는 자신의 책(『제국의 후예』)이 미국에서 출간된 지 17년 만인 2008년 국내에서 간행된 이후 자신의 책이 부적절하게 이용되고 있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1년 2월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입장과 유사했던 하버드대 법대 존 램지어(John M Ramseyer) 교수의 주장에 대해 ‘학문적 진실성을 위반했다’고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에컬트와 앤드루 고든(Andrew Gordon) 교수(하버드대 일본역사)는 램지어가 위안부 피해자들이 맺은 실제 계약을 확인하지 않았으며, 일본인 계약서를 잘못 인용한 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위안부 시스템이 고안되고 작동한 식민주의와 젠더 분야의 거대한 정치·경제적 맥락을 생략”했다고 비판했다.

한국을 사랑하는 법

에컬트 교수의 은퇴를 축하하는 학술회의에는 조선시대 연구자로부터 1980년대 비닐하우스 농법에 대한 연구까지 다양한 주제의 발표가 이어졌다. 스탠퍼드 대학에서부터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앞으로 세계 한국사와 한국학의 제3세대를 이끌어갈 학자들이다.

이 자리에서 무엇보다도 27년 전 필자가 하버드에 처음 발을 디뎠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국내와 국외의 연구자들 간에 전혀 소통이 없었던 27년 전과 달리 이제 하버드 및 유수 대학에 있는 연구자들은 국내 학계와 적극 소통하고 있다. 이러한 소통의 과정에서 해외의 2세대 연구자들, 특히 에컬트 교수는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학자들을 초청했고, 한국 출신 연구자를 하버드 교수로 영입했으며, 한국 출신 학생들을 박사로 배출하여 유수 대학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최근 은퇴한 덩컨과 커밍스에 이어 에컬트도 은퇴하지만, 그들이 했던 노력은 앞으로 세계 한국학 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몇 년 전까지도 초록색 소나타를 몰고 다녔던 에컬트 교수는 은퇴식의 마지막에 두 가지 말을 제자들에게 남겼다. “한국을 객관적으로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이 가장 한국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끝까지 자료를 포기하지 마라.”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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