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속 산불’이란 말장난

2025-04-20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지난 15일 정부세종청사 중앙동 브리핑룸에서 행정안전부, 산림청, 기상청 등이 정책설명회를 개최했다. 안건은 ‘초고속 산불 대비 주민대피체계 개선방안’이다.

안건에 대한 보도는 다음날(16일)로 예정된 터였다. 기자들을 하루 일찍 불러 뭘 하려는지 싶었다. 혹시나 역대 최악의 산림·재산·인명피해를 낸 영남지역 대형산불을 놓고 대응의 문제점에 대한 반성과 사과가 있을까 싶었다.

역시나 사과 따윈 없었다. 홍종완 행안부 사회재난실장은 “전력을 다해 대응했지만 기존의 대응체계로는 일부 한계가 있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잠시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것은 반성인가 사과인가. 아니면 참사를 지켜본 ‘관전평’인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니. 혹여 인정해야 해서 분하고 억울한가.

사과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우선 사과할 만큼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일 테다. 홍 실장의 말처럼, 전력을 다했는데 ‘대응체계’에 문제가 있던 거다. 대응체계가 잘못했다.

괜히 사과했다가 책임져야 할까 봐서일 테다. 행안부 차관도 있고, 대통령 권한대행도 있는데 실장이 굳이 사과하고 책임질 필요가 있나. 산불 주무부처는 산림청인데, 책임지려면 산림청장이 하는 게 맞지 않나. 이런 얄팍한 생각들이 설명회에 나온 공무원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

한편으론 별로 놀랍지도 않다. 사과와 책임지는 것에 인색한 건 이 정권의 특기 아닌가. 이태원 참사 때도 그랬다.

유가족들에게 집권당 소속 인사는 “시체팔이”라고 막말을 퍼부었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에 나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야당을 향해 “북한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상민 전 행안부 장관은 최장수 재임기록을 세웠고, 퇴임하면서 퇴직금도 살뜰하게 신청해뒀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산불 피해복구가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휴가를 써가며 대선판에 뛰어들었다.

이런 정부에서 예하 공무원들이 뭘 배웠겠나. 본래 그들은 ‘적응’이 빠른 존재들이다.

정부 입장에선 산불 국면에서 하나 성과가 있을 것이다. ‘초고속 산불’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들어봐도 입에 짝짝 달라붙는 말이다. 그간 정부 당국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대순간풍속 27m/s 이상’의 강한 돌풍이 불어대는 통에 대응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형 인재(人災)이기도 했던 산불은 ‘자연재해’로 둔갑했다.

자연재해라는 말만큼 공무원들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마법의 언어가 또 있을까. 단연 정부 대외 홍보 및 리스크 관리의 모범 사례라 할 만하다. 최근 모 기업이 홍보팀을 새로 꾸리려 인재를 수소문한다던데, ‘초고속 산불’을 고안해 낸 공무원이 누군지 꼭 찾아보시라.

정부에 당부한다. 이번에도 백서를 낼 거면 부디 ‘초고속 산불 백서’라고는 하지 말자. 제목 장사를 하더라도 일단 이건 사실이 아니지 않나.

과거 대형산불 사례를 보면 어김없이 강풍이 불었다. 낙산사를 잃은 2005년 양양산불 당시 최대 32m/s 이상 강풍이 관측됐다. 2019년 고성·속초 등 강원산불 때는 최대 35.7m/s의 강풍이 기록됐다. 바로 3년 전 울진·삼척 산불도 최대 27m/s의 강풍을 확산 원인으로 들었다. 이런데도 영남산불을 놓고 초고속이라며 요란을 떠는 게 과연 옳은지 가슴팍에 손을 얹어보라.

‘동시다발 산불’은 이미 2023년 백서에서 써먹었으니 (대체 이 백서도 왜 냈는지 모르겠지만) 고민할 듯싶어서 하는 당부다.

이번 산불은 ‘영남 산불참사’로 불러야 마땅하다. 사망자 상당수는 60~70대 이상 고령층인 약자다. 뒤늦게 대피하다 화마를 만났거나, 대피 사실도 모른 체 있다가 사망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영양군수가 자력 대피도 쉽지 않은 고령층이 대다수인 주민들을 향해 “불 끄는 데 동참해달라”고 호소한 장면은 황당하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했다. 정부는 ‘초고속 산불’을 운운하기 전에 ‘초고속 사과’부터 했어야 한다.

21일은 산불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다. 위성에서 내려다본 한반도의 허리는 새까맣게 그을려 있다. 산불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들의 마음속에, 잿더미가 된 이 산하(山河)에, 부디 ‘초고속으로’ 새살이 돋아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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