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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동차와 반도체, 의약품에 대해 25% 이상의 고관세를 예고하면서 전 세계가 무역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다. 이민과 마약 유통을 문제 삼아 중국과 접경국에 관세 부과를 발표한 후 철강·알루미늄, 상호 관세까지 숨 가쁘게 이어지는 관세 폭풍의 연장선이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까지 발표를 미리 예고한 뒤 실제 발표 시점과 시행 시점은 시차를 두는 패턴을 보인다는 점에서 관세를 지렛대로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거래의 기술’을 구사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8일(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4월 2일 25% 수준의 자동차 관세를 발표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우리는 그들(기업들)에게 들어올 시간을 주고 싶다”며 협상의 여지를 뒀다. 이어 “그들이 미국으로 와서 여기에 공장을 두면 관세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약간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고강도 관세를 때리기 전에 미국에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만들라는 노골적인 압박이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발표에 앞서 일정이나 관세율 등 일부 정보를 예고하는 수순을 밟았다. 자동차 관세의 경우 7일 미일 정상회담에서 부과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으며 이후 상호 관세를 발표하던 13일에도 부과 의지를 재확인한 바 있다. 이날이 세 번째 예고인 셈이다.
예고 후 시행 시점까지도 시차를 두고 있다. 13일 발표한 상호 관세의 경우 4월 2일까지 상무부가 각국의 상황을 연구하도록 했다. 연구 이후 실제 부과까지 더 늦어질 수도 있는 대목이다. 현지 싱크탱크에서는 이 같은 패턴이 일종의 협상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애틀랜틱카운슬의 조시 립스키 매니저는 “모든 국가가 4월에 상호 관세에 직면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여러 국가가 지연이나 면제, 협상 방법을 찾을 것이고 다른 나라 정상이 백악관에 무엇을 들고 찾아갈지 지켜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관세에 대한 속도 조절과 강도 조절이 임기 내내 지속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통령의 사전 예고 후 협상 기간을 두는 시차 전략이 국채금리 급등과 증시 하락을 막기 위한 조치로 해석되는 까닭이다.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10년물 국채금리가 급등하는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이 나타날 경우 경제의 부담이 커져 트럼프 대통령이 세금 감면이나 관세 등 핵심 정책을 추진할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판단도 자리하고 있다. 트럼프의 오랜 경제 자문이었던 스티븐 무어는 특히 “대규모 관세가 (채권 자경단을 부르는) 트리거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증시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 발표와 동떨어지는 흐름이 포착된다. 울프리서치에 따르면 산업 장비 생산 업체인 캐터필러와 장난감 업체 해스브로, 수입품 위주의 잡화점 달러제너럴 등 보호무역 정책에 특히 취약한 업체들을 묶어 주가 흐름을 분석한 결과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발표와 낮은 상관관계를 보였다. 프리야 미스라 JP모건 자산관리 매니저는 “투자자들은 주가가 하락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정책을 유동적으로 조정할 것이라는 이른바 ‘트럼프 풋’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시장의 공포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 변동성 지수는 이달 초 잠시 18.6을 기록했지만 이날 15.35로 최근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역사적 평균은 19.5다. 인프라스트럭처투자자문의 재이 해드플드는 “이것은 경제적 관세가 아니라 정치적 관세이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며 “합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결국 대부분의 수입 상품에 5~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고 이는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관세가 부여될 경우 시장이 받을 충격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이어진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행정부가 인도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관세를 동일한 수준으로 인상한다면 미국의 공장들은 화학제품과 플라스틱에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며 “이는 베트남산 신발, 브라질산 기계와 농산물, 인도네시아산 섬유·고무 등 광범위한 제품에 적용된다”고 지적했다.
이미 소비자들의 물가 불안감은 커졌다. 미시간대가 이달 발표한 1년 인플레이션 기대치는 지난달 3.3%에서 4.3%로 1%포인트 급등했다. 경제 매체 배런스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인상 계획에 따라 더 많은 미국인들이 내년에 인플레이션이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ITC)는 관세가 1% 인상될 때마다 물가가 약 1% 상승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협상 결과에 따라 미국 경제에 득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조지메이슨대 메르카투스센터의 크리스틴 맥대니얼 선임연구원은 “관세가 미국에 매우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여러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국가들의 시장 개방을 끌어낼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무역을 촉진할 여지도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