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르포 | 36분에 한 명씩 자살, 이 정도면 '국가비상사태'
매년 늘어나는 자살자·유족, 예산 부족으로 지원 유명무실
유족도 ‘자살 고위험군’…자신의 상태 인지하고 상담해야
한국은 해마다 1만4000명 안팎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 공화국이다. 하루 평균 40명이 세상을 떠난다. 가족을 잃은 유족은 그 몇 배다. 직계가족을 자살로 잃은 사람은 일반인보다 자살 위험이 최대 20배, 우울증 발병률은 80배까지 치솟는다고 한다. 유족들은 또 다른 ‘자살 고위험군’인데도 사회와 제도의 시선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누구도 자살로 내몰리지 않는 사회’를 명문화한 일본과 달리 한국에선 자살을 개인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가족 해체나 일상의 붕괴, 혹은 사회적 낙인이 뒤따른다. 가족 구성원의 자살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유족의 일상 전체를 황폐화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버텨내고 있을까. 월간중앙은 가족의 자살을 경험한 이들의 일상을 동행 취재했다. 신원 노출을 극도로 경계해 취재 과정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거듭 약속한 뒤에야 힘겹게 응했다.
얼굴 피어싱만 5개…자살 충동 막아줘
8월 9일 토요일 새벽 2시,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뒷골목. 인파가 떼 지어 밀려 드는 골목 한 귀퉁이에서 한유정(가명·26)씨가 주위의 클럽 음악에 몸을 흔들고 있다. 그러다 행인과 눈이 마주치면 몇 걸음 다가가 “클럽에서 안 놀래요”라고 외친다. 대부분 무시하고 지나가며 몇몇은 짧게 고민하다 자리를 뜬다. 그녀는 맞은편에서 호객 중인 다른 가게 직원에게 말을 건다. 거기 사정은 어떠냐, 오늘 몇 명이나 끌어모았냐, 사장이 또 뭐라더냐…. 장마철이 끝난 직후의 후텁지근한 공기에 사람 냄새, 땀 냄새, 온갖 향수 냄새가 떠돈다. “요새 스트레스는 영업 실적이에요. 오늘만 해도 주말 특순데 손님들이 영 안 꼬여서.”

그녀는 자신이 이태원 골목에서 호객하는 일을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지난해 6월 부모가 함께 숨졌다. 당시 기억은 띄엄띄엄 단편적이다. 영안실과 장례식장, 텅 빈 집 그리고 응급실. 충격으로 인한 블랙아웃이다. 그녀는 자살자 유족이다.
얼굴에 피어싱을 다섯 군데 하고 왼쪽 손목에 문신을 한 한씨가 친척 중 유일하게 소통하는 사람은 둘째 이모다. 이모는 조카가 20대 중반에 대학을 자퇴하고 이태원에서 살아가며 경미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겪는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조카가 이태원에 머물 집을 구한다는 얘길 했을 때도 이모는 부동산을 알아봐 줬다. 대신 한씨에게 상속된 유산 일부를 자신이 관리하고 거기서 월세를 내주겠다면서. “이모더러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큰 돈을 제가 갖고 있으면 멍청하게 날릴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한씨의 부모는 1년 전 고향인 강원도의 한 건물 주차장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딸이 진 사채를 갚다가 업자의 거듭되는 폭언과 모욕을 견디지 못했다. “가끔은 엇나가도 딸이 평범한 축에 속할 거라는 믿음을 제가 깨버렸던 거죠.” 한씨가 손 댄 사채는 30만원을 빌리고 일주일 뒤 50만원을 갚는 전형적인 소액 대출이었다. 그게 1년 지나선 5000만원으로 불었다. 부모에게도 부담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괴감이었을 거라고 한씨는 말한다. “하루에 수십 통씩 부모님께 전화해 협박했어요. 거기다 중간에 ‘이건 불법 사채니까 갚을 필요 없다’며 도와주겠다던 남자도 실은 제 사정을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사기꾼이었고요. 그런 상황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셨던 거죠.” 부모의 유언은 짧았다. ‘빚은 다 갚았으니 너는 행복하게 살아라.’
장례식 때 한씨는 멍하니 서서 상주 노릇을 했다. 형제는 없었다. 친척들이 장례 절차를 모두 도와줬다. 워낙 바르게 산 부모여서 문상객이 많았다. 하지만 절차가 끝나자 친척들은 한씨에게 말도 없이 부조금을 나눠 가졌다. 그게 자기 몫이라는 건 알지도 못했다. 부조 명부도 받지 못했다. 믿을 사람 없는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조동현 한국자살유족협회 이사는 “유족들은 가족 구성원이 스스로 삶을 포기한 데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자책 속에 살아간다”고 말한다. 유족의 자살 위험과 우울증 발병률이 일반인의 최대 수십 배에 달하는 이유다. 문제는 이런 죄책감이 초기에 해소되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이 뿌리내린다는 점이다. 장례를 마치고 부모님이 살던 강원도 전셋집으로 돌아온 한씨에게도 ‘부모를 따라가야겠다’는 결론밖에 남지 않았다. “내 사채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났으니까.” 자정 무렵 손목을 그었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떴다. “동맥을 비켜간 거예요. 부모님 집에 더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서 대학 동기 자취방으로 떠났죠.”
대학 동기의 집은 서울 양천구에 있었다. 휴학하고 래퍼를 준비하고 있었다. 방 두 개짜리 빌라였는데 하나는 침실, 하나는 작업실이었다. 집에서는 온종일 누가 지껄이는 건지도 모를 랩이 흘러나왔다. 거실 소파에 그냥 누워만 있는데 어느 날 친구가 제안했다. “기왕 미대 나왔는데 내 자작곡에 맞는 그래픽을 그려보는 건 어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잠시나마 우울감이 덜해졌다. 뭔가를 창조하는 과정은 안정감을 줬다. 친구는 “이거 괜찮다”며 노래와 함께 SNS에 올렸고, 낯선 사람들로부터 ‘좋아요’와 댓글이 달렸다. 그 순간만큼은 부모의 부재도, 자신이 짊어진 과오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친구가 일하러 나가는 밤이면 여지없이 우울감이 덮쳤다. 소주를 세 병은 마셔야 겨우 잠들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웠고 걸핏하면 가슴이 조여 오고 숨이 가빠졌다.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고요. 그냥 끝내버리는 게 편하겠다는 생각만 들었죠.” 두 번째 시도는 충동에 가까웠다. 이번에는 친구가 돌아와 119 구급대를 불렀고 응급실 의사는 “30분만 늦었어도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죄책감 안고 살아가는 유족에게 전염되는 자살 충동
그날 이후 한씨는 장기 입원을 권유받았지만 병원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대신 외래 진료와 약물 처방으로 버텼다. 문제는 그녀가 원치 않아도 보호가 필요한 상황에서 제도적으로 개입할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2017년 5월 정신건강복지법 개정 이후 강제입원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예전에는 보호자 한 명과 전문의 한 명의 동의만으로 가능했지만, 지금은 보호자 2명과 전문의 2명의 동의가 모두 필요하다.
게다가 환자가 중증 증상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자·타해 위험성이 동시에 입증돼야 한다. 보호자가 어렵게 환자를 데려와도 “조건이 안 된다”며 돌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정신과 병상 수도 줄고 있다. 2017년 6만7000여 개였던 폐쇄 병상은 2023년 5만5000여 개로 감소했다. 응급입원조차 새벽 돌발 행동에 대응할 인력·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 전문가들은 “첫 자살 시도 후 6개월 이내가 재시도의 골든타임인데 제도가 그 시기를 놓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약을 먹으면 졸음이 쏟아졌고 낮에는 거실 소파에 늘어져 있다가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마셨다. 제정신으로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다 포기하고 나니까 부담은 없더라고요. 그런데 아주 깊은 곳에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렸죠.” 그래서 피어싱을 시작했다. 일종의 자해나 다름없는 행위에서 묘하게도 자살 충동이 억제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대학 동기의 권유로 이태원에서 일하게 됐다.
경기 수원 팔달구에 사는 이수정(가명·25)씨는 여동생의 자살 이후 홀로 남겨졌다. 부모는 그 일로 갈라섰고 이씨는 어머니 슬하로 들어갔지만 따로 떨어져 산 지 2년째다.
여동생은 고교 시절부터 X(구 트위터)로 성매매를 해왔다고 한다. 나이나 용돈에 맞지 않게 말본 골프웨어를 입고 다닐 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설마 했다. 어려서부터 봐온 여동생은 그저 어린애일 뿐이었다. 그러다 성 매수자의 아내가 스무 살이 된 여동생에게 상간 소송을 걸면서 모든 게 드러났다. 집은 난리가 났고 여동생은 목을 맸다. 온종일 연락이 끊겨 여동생 방문을 열었을 때 수정은 무릎부터 꺾여 쓰러졌다. “그 장면이 매일같이 떠올라요.” 이수정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제 평생 그림자처럼 달라붙겠구나.”

코로나19로 예산 끊겨, 정부 지원제도는 속 빈 강정
여동생이 떠난 뒤 직장을 그만뒀다. 한 달은 어떻게 버텨봤지만 사회생활을 견디기엔 정신적으로 붕괴 직전이었다. 죄책감 때문이다. 미리 알아채지 못했다는 죄책감.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던 부모가 이혼한 것도 역시 괴로웠다.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날 방문을 더 일찍 열었다면, 끝없이 자책했어요.”
자살자 대부분은 예고 없이 떠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96.6%가 사망 전 경고 신호를 보냈다. 주변이 알아챈 경우는 23%도 안 되지만, 남은 이들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 그리고 곧 심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로 이어지며 유족들도 자살 고위험군에 포섭된다.
전문가들은 이런 유족들의 심리를 ‘병적인 애도’라고 설명한다. “나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과도한 죄책감을 안게 된다. 실제로는 누구라도 놓칠 수밖에 없는 미묘한 신호였는데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나는 알고 있었다’고 기억을 왜곡해 자신을 탓하게 되는 것이다.” 배승민 가천대 길병원 소아정신과 교수의 설명이다. “결국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내가 초래했다는 식의 죄책감인데, 그 자체가 병적인 감정이란 것을 인지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정부는 자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제도적인 지원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하지만 매번 공수표로 돌아간다. 실제로 자살 유족의 상담·법률·생활을 도와주는 ‘원스톱 서비스’가 2017년 도입됐으나 전국 17개 시·도 중 12곳만 운영 중이다. 인구 1위 경기도는 예산 미편성으로 시작조차 못 했다. 4년 전 코로나19로 관련 예산은 끊겼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인구 10만 명당 한국의 자살률은 최근 5년간 평균 26.2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1위에서 내려온 적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다.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