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진흥왕 14년(553)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설계를 바꿔 절로 고쳐 지은 것이 황룡사다. 사찰의 이름도 여기에 근거한다. 공사를 시작해 17년 만인 569년에 완공됐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인도의 아소카왕이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았는데 이것을 재료로 574년 삼육존상을 만들어 금당에 봉안했다.
선덕여왕 때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9층 목탑을 세웠다.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했는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 완공됐다. 여러 번 중수를 거쳐 700여 년간 경주의 가장 거대한 사찰이자 건축물로 위엄을 이어가다가 고려 고종 25년인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
황룡사 9층 목탑에서 서라벌을 바라보면 어떨까? 고려시대 김극기의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김극기는 12세기 후반 고려 명종 때의 문인으로서 직접 목탑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타고 꼭대기 층에 올라 난간에서 경주 시내를 내려다보며 ‘황룡사’라는 시를 지었다.
皇龍寺
層梯繞繞欲飛空 층계로 된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萬水千山一望通 일만 강과 일천 산이 한눈에 보이네
俯視東都何限戶 굽어보니 경주의 수 없이 많은 집들
蜂窠蟻穴轉溟濛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황룡사에 벽화를 그린 솔거(率居)
솔거의 금당벽화 이야기는 <삼국사기> 권 제48 열전 제8 솔거에 전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솔거(率居)는 신라인(新羅人)으로 가난하고 변변치 못한 집에서 출생하여 그 출신을 알 수 없으나 그림 그리는 재주를 타고났다.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나무의 줄기와 몸통은 주름지고, 가지와 잎은 서려서 얼크러졌다. 까마귀·솔개·제비·참새가 간간이 바라보고 날아들다가 부딪혀 어름어름하며 떨어졌다. 세월이 오래되어 색이 암담해지자 절의 중이 단청(丹靑)으로 덮어 개칠을 하였더니 오작(烏雀)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다.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이 모두 그의 필적이니 세상에 신화로 전하여 온다.”
80미터 황룡사구층목탑
<삼국사기>에 따르면 황룡사구층목탑의 높이는 상륜부 42척을 포함해 225척이었다. 고려척으로 환산하면 약 80m에 달하는 거탑이었다. 고려척(高麗尺)이란 고려시대에 사용된 길이의 표준 단위 ‘자’를 말한다. 대체로 약 31~35cm 정도다.
황룡사의 대부분 목조 건축물은 주심포 양식을 사용했다. 주심포 양식은 다포계나 익공계보다 오래된 것으로 고구려 벽화고분에도 보인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널리 사용된 기법임을 알 수 있다. 포와 포 사이에는 인(人)자형 화반을 두어 상부 하중을 분배하고 있다. 또 최하층 지붕 처마가 길게 빠져나와 차양 기능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9층 목탑을 세우는 방법을 보자. 먼저 중심기둥을 세워야 하는데 이걸 ‘찰주’라 부른다. 주위에 4개의 기둥인 ‘사천주(四天柱)’를 세운다. 가장 중요한 가운데 찰주만 잘 세우면 탑은 거의 다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44년 찰주를 세우고 645년에 80미터 황룡사구층목탑을 완성했다. 황룡사의 마지막 정점을 찍은 황룡사구층목탑은 한국 고건축사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7세기 조성 당시에는 전 세계에서 나무로 지어진 가장 높은 목조 건축물이었다.
사람들은 황룡사구층목탑이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고 하지만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중국 북위에서 516년에 세운 낙양의 영녕사탑은 134미터였다. 달마가 이 탑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도 황룡사탑을 가장 높은 목조건축이라고 하는 이유는 뭘까? 영녕사탑은 아랫부분을 벽돌로 지어 많은 비중을 벽돌이 차지하고 맨 위에만 목재로 지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황룡사 9층 목탑은 모든 부재가 나무였다.
참고로,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는 BC 280년에 세운 135미터의 석조건축물이다. 건축에서 석조건축은 목조건축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감안하면 굉장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황룡사 30톤 심초석을 들어 올린 사람들
신라 경주의 3대 보물은 황룡사구층목탑, 황룡사 장육존상 그리고 천사옥대다. 이 중 앞의 2개가 황룡사에 있었다. 1982년 황룡사지에서 장육존상 불두의 머리카락 장식인 청동 나발편을 발견했다. 이로써 신라 최대의 황룡사 금동불 장육존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천사옥대(天賜玉帶)는 진평왕이 하늘에서 받았다는 옥 허리띠다. 하지만 몽골군의 침입으로 모두 불탔다. 지금은 텅 빈 절터에 심초석만 남아 그날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 심초석에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30톤짜리 심초석을 들기 위해서는 초대형 크레인이 필요했다. 1970년 당시 대한민국에 있던 크레인 3대 중 1대를 불러 들어 올렸다. 3대 중 2대는 부산에 있었으나 작업 중이라는 이유로 부를 수 없었고, 인천에 있던 1대가 마침 포항에서 일하고 있어 불렀다고 한다. 들어 올려 보니까 놀랍게도 30톤의 심초석을 몇 개의 돌로 수평을 맞춘 흔적이 드러났다. 신라 사람들이 당시 기술로 어떻게 이렇게 수평을 맞춘 걸까? 수평을 잡는 레벨기가 없던 시절 신라인들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찬란했던 사찰도 화마로 사라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돌만 나뒹굴었다. 경주시민들은 이 넓은 터를 자신들의 터전으로 삼았다. 눕혀진 돌을 치우고 때로는 세워서 한 뼘이라도 더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경작했다. 이처럼 문화재 훼손이 심하자 1964년부터 정부에서 경주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주민들을 철거했다.
그 결과 남은 건 딱 하나 심초석이었다. 이게 표적이 돼 도굴꾼들이 밤에 자키(Jack)를 가져와 그 속에 있던 사리함을 도굴했다. 2년 후인 1966년 도굴꾼을 잡아 일부 유물을 되찾았지만 사리함 정도였고 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심초석에서 발견된 ‘황룡사구층목탑 찰주본기’
심초석을 들어 올리자 사리공에는 경문왕 12년(872)에 제작된 찰주본기 명문이 적힌 금동사리함과 기타 사리장엄구 등이 봉안돼 있었다. 심초석 아래 하부석에서는 공양구로 추정되는 백자호, 청동사신문경, 태환이식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찰주본기를 살펴보자. 5장의 금동판과 뚜껑으로 구성된 방형함 모습이었는데 현재는 뚜껑 없이 경첩으로 이어진 금동판을 펼쳐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 4. 황룡사구층탑조와 거의 유사해 찰주본기의 가치를 증명해준다. 주요 내용을 보자.
1. 제1판 내면에서는 ‘황룡사 찰주본기’라는 제목과 ‘박거물’이라는 지은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
2. 선덕여왕(善德女王) 12년 자장(慈藏)이 중국의 종남산에서 원향선사에게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면 해동의 아홉 나라가 모두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와 고한 뒤 이 탑의 조성이 추진됐다고 적혀 있다.
3. 제2판 내면에는 선덕여왕 15년에 탑이 완성된 뒤 90여 년이 지나 탑이 기울어 경문왕(景文王) 11년(871)부터 중수가 추진됐다고 적혀 있다.
4. 제3판 내면에는 이듬해까지의 중수 과정을 정리한 목적이 적혀 있다.
5. 김위홍 등 중수를 주도한 관리들과 참여한 승려들, 내외직(內外職) 관리들, 황룡사·감은사(感恩寺)의 승려들 이름이 적혀 있다.
6. 끝으로 글을 새긴 이들이 언급됐다.
따라서 황룡사구층목탑 찰주본기는 목탑의 건립부터 중수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고대 탑지(塔誌) 중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황룡사구층목탑 재현한 보문단지 ‘황룡원’
황룡원은 경주 더케이호텔 옆에 있는데 높이 68미터 15층 높이다, 보문단지의 랜드마크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황룡원의 석불관에는 석굴암을 실제크기로 재현해 놓았다. 실물을 제대로 보고 싶으면 이곳을 찾으면 된다. 또 이 탑 꼭대기인 9층에는 대원정사(大圓精舍)가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법당일 가능성이 크다.
내부로 들어가 보자. 실내 디자인은 경주 지역의 문화재에서 모티브를 땄다고 한다. 내부 시설을 보면 공양실, 법당, 작품 전시 공간 등이 있다. 중앙에 잔디정원이 있고, 수공간은 안압지를 본떠 만들었다. 그 외 연회장과 연수동 건물 4층에는 한옥 체험실이 있다. 황룡원은 공부하고 수행하고 명상하는 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황룡원은 한 사람의 기업인이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되살린 자랑스러운 예다. 황룡원은 건축사적으로 보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동국제강이 철강재를 생산하니까 현대기술로 황룡사구층목탑을 재현해보자는 발상에서 시도했다고 한다.
사실 목재로 만드는 구층목탑은 현대기술로도 재현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현재 이 건물은 100% 목조공법이 아니다. 안전과 편의를 위해 현대적 기술을 총동원했다. 동기와를 사용했고 외형과 세부 디자인은 우리 옛것을 살리려 노력했다. 난간대와 곡선, 공포의 부재 등은 자문위원의 의견을 들어 요즘 시대에 맞추려 노력했다. 특히 앙곡의 멋은 가히 일품이다. 앙곡(昂曲)이란 처마의 끝 선이 수평이 아니라 양 끝으로 갈수록 위로 살짝 올라가도록 만든 곡선을 말한다.
동국제강에 대해 잠시 보자. 경주 황룡원을 세운 이는 장상건인데 동국제강 장경호 창립자의 여섯 아들 중 다섯째다. 부친 장경호는 서울 남산 아래 대원정사를 세웠고 불교방송을 시작했다. 장경호는 평소 “재산은 민족과 사회에 보답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75년 타계 직전 사재 30억 원을 사회에 헌납했는데 이 돈으로 대한불교진흥원이 설립됐다. 이 대한불교진흥원이 1990년 BBS 불교방송을 시작했다. 동국제강 창업주의 사재 출연이 불교방송 설립의 직접적인 기반이 됐다.
아들이 선친의 뜻을 이어서 황룡원 불사를 한 셈이다. 희한하게 동국대학교와 동국제강의 이름이 닮았다. 하지만 학교 재단과 기업은 전혀 관계가 없다.

남문-중문-목탑-중금당-강당, 남북 일직선 배치
실제 발굴 조사된 황룡사 담장 안 면적은 동서 288m, 남북 281m로 약 8만928㎡(약 2만5000평)이다. 금동불상, 치미(鴟尾)를 비롯한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황룡사 가람은 창건 이후 크게 3차례에 걸쳐 형태의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최종 가람의 형태는 남문-중문-목탑-중금당-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두고 중금당 좌우에 동·서 금당을 배치했다. 탑의 전방 좌우에는 종루와 경루를 대칭되게 배치했다. 여기서 경루(更漏)는 물시계를 말한다. 종루와 함께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됐다. 동·서·남쪽에 마련된 회랑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상태였다.
1982년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금당지와 목탑지 사이에 석등의 흔적과 석등 부재를 확인했는데, 석등 부재는 연화 하대석, 간주석, 화사석 등이었다.
한편, 황룡사 9층 목탑을 바위에 새긴 곳이 있다. 바로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보물)이다. 9m나 되는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과 목탑을 회화적으로 묘사했는데 특히 남쪽의 큰 바위 면에는 불타 없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의 형상을 추정할 수 있는 목탑 부조상이 조각돼 있어 주목된다.
글 김상범 울산지역사답사회 부회장
사진 변상복 울산지역사답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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