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 출신의 현대미술 거장 호안 미로(1893~1983) 하면 높은 채도의 원색이 돋보이는 그림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의 손에서도 거친 질감의 청동 조각이 나왔다.
서울 용산구의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에서 열리고 있는 ‘조각의 언어’는 3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미로의 개인전이자,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미로의 조각만을 조명하는 전시다. 그림 1점과 미로를 찍은 사진 2점을 제외하면 미로가 만든 청동 조각만 15점이 배치돼 있다. 미로는 평생 약 400점 정도의 청동 조각을 제작했다고 하는데, 이번 전시에는 1976년부터 별세 전 해인 1982년까지 미로가 예술 생활 말년에 만들어낸 것들이 나와 있다.
청동 특유의 거칠고 차가운 질감에 미로가 다양한 표현을 더하면서 작품들은 독특한 느낌을 낸다. ‘토르소’(1981)에서는 의도적으로 손바닥 자국을 냈다. ‘기념비를 위한 구상’(1981)은 그의 고향인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건축물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높은 첨탑을 연상케 한다. ‘체조 선수’(1977)는 미로의 조각 작업 형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예술 인생 말년을 스페인 마요르카섬 세르트의 작업실에서 보내면서, 섬에서 수집한 자연물과 잡동사니들을 소재로 삼았다. 필요한 소재를 미리 정해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다 자연스럽게 영감을 주는 것들을 작업실로 가져온 뒤 바닥에 흩어 놓고 본능적으로 조합하는 방식을 썼다. ‘체조 선수’가 옷걸이와 천 조각, 막대기 등이 함께 붙어 있는 형상인 이유다. 폐품을 비롯한 여러 잡동사니를 조합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아상블라주’인데, 미로가 회화나 조각에서 모두 초현실주의 작업을 계속해왔음을 알 수 있다.
외부와 통하는 전시장 야외 중정에는 높이가 3.3m에 이르는 ‘여인과 새’(1982)가 자리한다. 이는 바르셀로나 호안 미로 공원에 설치된 높이 22m 대형 조각 ‘여인과 새’(1983)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형형색색 타일이 모자이크된 대형 작품과 달리 흙빛 단색으로 돼 있지만, 여성을 뜻하는 기둥 위에 오른 초승달 모양의 새가 올라와 있는 구조는 같다.
한지를 사용해 한옥의 차경(경치를 빌려옴) 개념을 구현한 전시장 구성은 이색적이다. 미로는 1944년 도예가 조셉 로렌스 아르티가스와의 협업을 시작했는데, 이때 아르티가스의 작업실에는 나무로 불을 때는 한국식 도자 가마도 있었다고 한다. 미로는 그러면서 신성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전통의 방식을 고집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태도가 그의 조각 작업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데우스 로팍에서는 미로의 전시와 함께 한국 작가 정희민(38)의 개인전 ‘번민의 정원’도 함께 열리고 있다. 청동 조각과 3차원(3D) 모델링 프로그램과 아크릴 물감에 광택을 더하는 물질인 ‘겔 미디엄’을 이용한 회화 등 작품 11점이 전시돼 있다. 정희민은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세계, 그 사이를 오갈 때 느끼는 불안함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왔다. 자연의 것들로 채워졌지만 사실은 인공적으로 꾸민 공간인 ‘정원’이 전시명에 들어가 있는 것은 이를 은유한다.
미로와 다른 시간대를 사는 작가가 최신 기술을 사용해 만든 결과물이 미로의 조각처럼 거친 질감을 보여준다는 점은 흥미롭다. 정희민은 “회화는 곧 풍경화”라며 자신의 그림을 “초현실주의적 풍경”이라고 설명한다. 두 전시 모두 내년 2월7일까지.



![[김상미의감성엽서]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https://img.segye.com/content/image/2025/12/02/20251202517886.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