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과학기술 없는 미래는 없다

2025-08-27

미국의 관세 장벽이 세계 경제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1990년대 자유무역협정(FTA) 등 글로벌 무역 체제는 '관세 없이 저렴하게 생산한 국가가 전 세계 수요를 충족하면, 지구촌 인류 모두가 낮은 비용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논리에 기반했다.

그러나 최근 미·중 경쟁이 격화하며 경제 이념과 무관하게 각국이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인구가 적고 제조업 중심으로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은 위기에 놓였다. 강대국 간 패권 경쟁 속에서 버틸 수 있을지 불안감이 커지고, 국가는 생존 전략 대전환 기로에 서 있다.

현 정부는 국가 경제 생존을 위해 '인공지능(AI) 3대 강국'을 목표로 내세웠다. AI는 과거 화학공업→기계→조선→반도체로 이어졌던 특정 산업 성장 단계와 달리 국가 경제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장기적이고 광범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변화에 대응하려면 창의력과 사고 유연성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며, 그 토대는 수학·물리·화학 등 기초과학 기반 교육이다.

새 정부 출범 두 달 만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정부는 2026년 예산 중 연구개발(R&D)비를 역대 최대인 35.3조원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는 과학기술계가 요구해 온 국내총생산(GDP) 대비 5%를 넘어서는 역대 최대 규모 투자 결정으로, 전례 없는 R&D 삭감으로 절망에 빠졌던 과기계를 회복시키려는 선언이다.

2024년 전 정부의 갑작스러운 삭감은 연구 현장에 충격을 줬고, 국가 발전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올해 약 30조원 규모 국가 R&D 예산 중 기초연구 비중은 7.8%에 불과하다.

반면 2023년 말 급하게 선정된 12개 국가전략과제에는 5.7조원이 배정됐다. 다행히 이번 정부가 2026년 기초연구 예산을 3.4조원으로 14.5% 증액하고, 개인기초 연구과제 수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과제별 최소 연구기간을 1~3년에서 3~5년으로 늘리기로 한 것은 연구 몰입 환경 조성을 위한 긍정적 신호다.

2026년 정부 R&D 예산(안)은 의미 있는 첫걸음이라 할 만하다. 연구자 한 사람으로서 환영하면서도, 일시적 조치일까 불안함도 있다. 예측 불가능한 정책은 청년층의 이공계 기피를 심화시키고,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뒤처진다는 연구 현장 위기감을 키운다. 정권 교체마다 예산 기조가 뒤바뀌는 불안정한 집행은 지양해야 한다.

과학기술 정책은 단기 성과 중심에서 벗어나 우수 인재 양성과 창의적 생태계 구축으로 재편돼야 한다. 특정 분야에 편중된 지원보다 다양한 분야 균형 성장이 필요하다.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R&D 예산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GDP나 내국세에 연동해 국가 R&D 예산을 배정하는 국가기술기본법 개정이 요구된다. 구체적으로는 'GDP의 5% 이상 투자'와 '그중 15% 이상은 기초연구사업'이라는 조항의 명시가 필요하다.

현행 과학기술기본법,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은 총액이나 비율을 강제하지 않아 정권 기조에 따라 삭감이 가능하다. 미국은 나노기술, 양자 등 대통령이 주도하는 단일 테마 연구를 법제화해 장기간 유지한다. 반면 한국은 정권 교체 때 R&D 예산 우선순위가 바뀌기 쉽고, '선택과 집중' 명목으로 예산이 재배분되기도 한다. 전략기술 지원이 개인 연구비 축소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미래는 과학기술에 달려 있다. 우수 인재 양성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체계적 지원 없이는 과학기술 중심 국가 도약은 불가능하다. 지금이야말로 과학기술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결정적 시점이다.

김성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 sjkim@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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