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 “문학은 문제집 다음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책”

2025-04-30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 국내 작가들이 해외 유수 문학상에서 후보에 오르고 수상까지 한다. ‘텍스트힙’ 열풍은 책에 관심 없던 이들에게도 무언가를 읽는 행위가 멋진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과실은 모두에게 돌아가진 않는다. 작은 출판사들은 여전히 어렵다. 그럼에도 그들은 책을 만든다. 누군가 주목하지 않아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문학의 한 터전을 일궈내는 이들을 만나 왜 문학을 하는지 듣는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출판 골목의 한 건물에 배우 박정민이 차린 출판사 ‘무제’의 사무실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벽 한 편에 붙은 여러 포스터들이 눈에 띈다. 영화 <캐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등이다. 사무실 한 쪽 면을 가득 채 책장 한쪽에는 DVD를 포함해서 만화책 <20세기 소년>, <몬스터>, <도쿄 구울> 시리즈가 가지런히 꼽혀있다. 오른쪽 책장 가장 위쪽엔 ‘대표 박정민’이라 적힌 작은 명패가 놓였다. “올해는 영화보다 출판사 일을 하며 살겠다”는 박정민 ‘무제’ 대표를 지난 24일 만났다.

무제는 2019년 문을 열었다. 2020년, 2024년 각각 에세이 <살리는 일>과 <자매일기> 냈지만, 출간 텀이 꽤 길었다. 박 대표가 영화로 바빴던 시기다. 출판사로서 본격적인 업무는 지난해 말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출판사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만들고 사무실도 재정비했다. 1인 출판사나 다름없이 운영하다 정식 직원도 한 명 더 뽑았다. 그리고 이달 ‘듣는 소설 시리즈’의 첫 책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가 이달 나왔다. 시각 장애인을 위해 오디오북으로 먼저 발매된 책은 다음 달 종이책으로도 출간한다.

제목이 없다는 뜻의 출판사 이름 ‘무제’는 그가 지었다. 소외되고 이름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출판사가 되겠다는 뜻인데, 듣는 소설 프로젝트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박 대표는 출판사를 차리고 책을 냈지만, 그 즈음 시력을 잃은 아버지에게 책을 보여드릴 도리가 없어 고민하다 오디오북을 떠올렸다고 했다. 2022년 말쯤 기획하고 김금희 작가와 원고를 계약했다. 지난해 원고가 나오고 출판사 대표로서 그의 업무가 시작됐다.

최근엔 출퇴근 혼잡 시간을 피해 아침 6시에 사무실로 출근해 밤 12시쯤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전날에도 책 관련 미팅 세 건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편집이나 책 디자인 등은 외주를 주지만, 아침에 서점에 발주를 넣거나 업체에 입금하러 은행에 가는 등 출판사 직원이 하는 모든 걸 하고 있다”며 “회사에 다니는 분들을 늘 존중하지만, 이 일을 하고 더 많이 존경하게 됐다. 가까이는 우리 매니저들이 정말 고생하는구나 깨닫는다”고 말했다.

듣는 소설은 현재 세 번째 책까지 계약을 완료했다. 박 대표는 “내년 이맘때쯤엔 두 번째 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며 “출판사로서는 신인 작가들과 함께하는 책을 많이 작업하고 싶지만, 듣는 소설은 특성상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누군가 기다리는 작가, 소위 말해 유명한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작가에 대한 힌트라면 “내가 사랑하는 대사를 쓰는 작가들”이라고 했다.

현재까지 출판사가 계약을 완료하고 출간을 계획하고 있는 책은 해외 소설 등을 포함해 9권 정도다. 장르를 가리지는 않겠다지만 문학에 방점이 찍힌 것은 사실이다. 왜 문학이냐는 물음에 예전 얘기를 꺼냈다.

“스무살 때 배우인 친구 조현철의 추천으로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처음 읽었다. 머릿속에서 기억하는 첫 소설이다. 그전까지는 책이라면 내게는 오로지 문제집이었는데, 그 소설이 너무 재밌어서 그 이후 김영하를 독파했다. 그렇게 박민규 등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을 읽다 보니 책 자체가 좋아졌다. 문학이 문제집 다음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밀접하게 붙어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젊은 독자들에게 다가가기도 좋다고 생각한다. 문학 출판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내가 문학을 좋아해서가 가장 크다.”

문학 계간지 등을 보며 좋아하는 작가를 발견한다고 했다. 최근 성해나 작가의 소설집 <혼모노>에 추천사를 쓰며 작가에 대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는데 “창비 계간지에서 처음 작가의 글을 봤다”고 말했다. 해외 도서를 소개하는 에이전시에서 출판사에 보내는 글도 꼼꼼히 읽어본다. 그는 “우리에겐 주로 일본 소설이나 영상화가 되기로 한 소설 같은 것이 자주 추천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교동 출판 골목 한복판에서 배우라는 직함은 그를 “주눅” 들게도 했지만 최근 출판 업계와의 교류가 “슬금슬금 생겨”나는 중이라고 했다. 박 대표는 “생태계 교란종같은 느낌이 스스로 싫었다. 기존 출판 업계에 계신 분들이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생각하기도 했다”며 “다행히 많이들 호의적이다. 이제는 제가 먼저 다가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책은 주로 사서 본다고 했다. 그는 “내 것을 소유하는 느낌이 좋다. 일단 도서관을 갈 시간 자체도 많이 없다”고 했다. 사무실 한 켠에 박준 시인의 신작 시집이 놓여 있었으나 “읽고 싶은데, 출판사 일로 피곤해서 열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올 한 해는 배우 일을 잠시 쉬고 출판에 매진할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사비를 써서 운영을 해왔지만, 출판사로서 무제가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다진 뒤에 다시 배우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다. 그는 출판사의 향후 계획과 출간 방향에 대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분들, 소리 내고 싶지만 낼 수 없는 상황에 있는 분들은 작가를 붙여드려서라도 도와드리고 싶다. 그런 분들을 위한 스피커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무제가 출판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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