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향신문 플랫X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공동기획
(1)사라지지 않는 이미지들_일본
디지털 성폭력은 ‘어느 한 나라의 문제’라고 부르기 어렵다. 피해 발생부터 성착취물의 제작과 유통, 확산, 삭제 대응까지 모든 단계가 국경을 넘나들며 이뤄진다. 가해자는 해외 플랫폼을 통해 익명으로 콘텐츠를 퍼뜨린다. 피해자의 사진과 영상, 정보는 순식간에 다국적 서버를 넘나들며 지우기 어려운 형태로 박제된다. 글로벌 소셜미디어 운영사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들은 각국의 법과 제도적 한계 속에서 제대로 구제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디지털 성폭력에 대응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온라인 플랫폼 ‘Safer Online, Stronger Together’를 17일 열었다. 디지털 성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이해하고 피해 경험자와 시민이 문제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적이다. 이 페이지에서는 디지털 성폭력 대응 활동과 함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기술 매개 젠더 기반 폭력을 막기 위해 싸우고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싣는다. 활동가들의 시선으로 디지털 성폭력의 구조를 읽어내고 국경을 넘어 함께 문제를 해결해내기 위해서다.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취합한 아시아권 활동가들의 서면 인터뷰를 기사로 모았다. 디지털 성폭력과 맞서 싸우며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경험을 통해 디지털 성폭력은 기존 성폭력보다도 더 극심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일본 시민단체 ‘포르노그라피와 성폭력에 맞서는 사람들의 모임(PAPS)’의 가나지리 가즈나 대표는 “성착취와 디지털 성폭력은 뗄레야 뗄 수 없이 연결돼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2009년 설립된 PAPS는 성착취와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다. 온라인 그루밍과 성착취, 성인용 영상물(AV) 강제출연 등의 피해 상담, 삭제 지원과 함께 성구매 문화 근절 등을 공론화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디지털 성폭력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합법적으로 촬영할 수 있는’ AV 촬영·유통으로 발생하는 피해 문제가 심각하다. 일반 모델 촬영인 줄 알고 응했다가 성적 영상 촬영을 요구받고 거부하면 위약금을 청구하겠다고 협박하는 경우도 있고, 촬영 수위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계약했는데 가학적인 촬영이나 원하지 않는 노출을 강요받는 일도 있다. 영상 공개 후 1년간 무조건적인 계약 해지가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AV 출연 피해방지구제법’이 2022년 제정됐지만 여전히 피해가 끊이지 않는다.
가나지리 대표는 “AV 출연 피해방지법은 민법상 최고 수준의 보호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며 “하지만 아직도 성적 이미지를 유포하겠다는 암시나 협박, 삭제 대가로 금전이나 성적 행위를 요구하는 일이 처벌되지 않고 있어서 문제”라고 말했다.
PAPS 활동가들이 현재 일본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심각한 온라인 젠더 기반 폭력으로 지목하는 것은 ‘섹스토션’이다. 섹스토션은 성적 이미지나 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해 금전을 요구하거나 다른 성적 행위를 강요하는 범죄를 말한다. 한국의 ‘n번방 사건’도 조직적 섹스토션 범죄의 한 예다. 성착취 피해가 X(옛 트위터)·라인·인스타그램·디스코드 같은 글로벌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확산된다는 점도 한국 상황과 유사하다.
가나지리 대표는 “X와 디스코드에는 수익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여성혐오적 계정과 커뮤니티가 존재한다”며 “이들은 특정 해시태그나 은어를 일종의 암호처럼 사용해 이용자를 모으고, 성착취물이 여러 소셜미디어를 오가며 재게시돼 피해가 확산된다”고 말했다.

글로벌 소셜미디어 기업들은 대응에 소극적이다. 가나지리 대표는 “글로벌 SNS 기업들이 이러한 콘텐츠를 삭제하지 않거나, 삭제를 현저히 지연하는 사례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며 “일본 국내법을 준수하는 삭제 요청 시스템조차 마련하지 않은 플랫폼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직접 대응해야 하는 시스템도 문제다. 그는 “피해자들은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자신의 성적 이미지를 보관하고 제출해야 한다”며 “온라인에 퍼진 자신의 이미지를 직접 찾아 확인해야 하는 고통 역시 심각한 2차 피해를 유발한다”고 덧붙였다.
PAPS는 피해자들을 도우면서 디지털성폭력이 기존 형태의의 성폭력보다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법, 학교, 경찰, 행정기관 모두 이런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고, 피해자 중 매우 많은 수가 미성년자였습니다. 이들은 극도의 공포와 수치심에 갇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죠. 자살로 내몰린 사례도 여러 건 목격했습니다.” PAPS 활동가들의 설명이다.
PAPS에 들어오는 피해 상담 건수는 2021년 643건에서 2022년 1208건, 2023년 1867건 등으로 계속 늘고 있다. 가나지리 대표는 “일본 사회에는 성적 착취에 관대해온 구조적 문제가 있다”며 법과 제도 전반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여러 사건들을 거치며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용어가 정착됐고 온라인 공간에서 발생하는 성적 피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법 체계가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담 건수가 급증하면서 피해자를 돕는 사람들이 번아웃 상태에 빠지는 것도 문제다. 그는 또 “사례를 국가 간에 공유하고, 글로벌 SNS 기업에 대한 국경을 넘는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며 국제 공조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 남지원 젠더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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