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4월25일. 미국 뉴욕 소재 호레이스 만 학교에 다니던 18세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은 영어 시험을 보던 중 자신을 찾는 전화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교장실로 내려갔다.
수화기 건너 그의 매니저는 슈퍼스타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만이 건강 문제로 이틀 뒤 런던 공연을 취소했으니 ‘대타’로 무대에 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샤함은 “할게요”라고 답한 뒤 다음날 런던으로 날아갔다. ‘펄만의 연주를 기대했던 관객들이 야유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LA타임스는 “스타가 탄생했다”고 썼다.
우리 시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샤함(54)은 13일 경향신문과 e메일 인터뷰에서 그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 순간은 제 삶의 경로를 바꾼 우연한 기회, 선물과 같았습니다. 만약 제가 교실에 남아 있었다면, 분명히 다른 길을 걸었겠지만, 음악에 대한 저의 열정이 결국에는 비슷한 목적지로 이끌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교훈은 기회가 왔을 때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샤함은 오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세계적인 현악 앙상블 세종솔로이스츠와 함께 연주할 예정이다. 공연은 오는 22일부터 시작하는 음악 페스티벌 ‘힉엣눙크!’ 프로그램 중 하나다. 8회째인 올해 ‘힉엣눙크!’에는 10개 프로그램에 38명의 예술가가 참여한다.

이번 공연에서 주목할 점은 샤함의 아내이자 음악적 동반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아델 앤서니(55)가 함께 무대에 선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협연은 한국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부부는 1부에서 비발디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라 폴리아’ 변주곡,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BWV 1043’, 2부에서 이스라엘 작곡가 아브너 도만(50)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슬퍼할 때와 춤출 때’를 연주한다.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BWV 1043’은 2악장의 초월적인 아름다움이 도드라지는 곡이다. 도만의 ‘슬퍼할 때와 춤출 때’는 지난 4월 부부가 세종솔로이스츠와 함께 뉴욕 카네기홀에서 초연한 작품으로, 이번 공연은 아시아 초연이다.
앤서니는 도만의 작품에 대해 “바흐의 작품을 아름답게 보완하는 매우 흥미로운 곡”이라면서 “이 작품의 매력은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구조를 차용하고 강력한 서사를 전달하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샤함은 “낭만주의 음악에 특별한 유대감을 느끼지만 나이가 들면서 모든 시대의 음악을 감상하고 그 속에서 흥미를 찾게 되었다”고 말했다. “바로크 시대, 특히 바흐는 영적인 토대를 제공하고 현대 작품들은 새로운 소리와 가능성을 탐구하도록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킵니다. 각 시대는 음악과 삶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제공합니다.”
샤함과 앤서니처럼 부부가 꾸준히 같은 무대에 서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인생의 동반자와 무대를 함께할 때 느껴지는 깊은 교감이 있습니다.”(샤함) “무대에 오를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동시에 연주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하죠.”(앤서니)
두 사람 모두 세종솔로이스츠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샤함은 세종솔로이스츠 창립자인 강효 교수(줄리어드 음악원)의 제자다. 세종솔로이스츠와 공연과 음반 작업을 함께 해왔다. 앤서니는 세종솔로이스츠 창단 이후 12년간 리더를 맡았다.
부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세 명의 아이를 키웠다. 앤서니는 “가족과 아이들이 최우선이고 우리는 아이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정을 계획한다”고 말했다. 샤함은 “음악과 가족의 삶을 분리하기보다 음악을 가족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