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는 명백한 조작 사건, 대한민국 법원 재심 결정을(2)

2025-09-06

1946년 ‘정판사조작사건’이 벌어진 배경

1946년 5월 15일, 미군정 공보부는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원래 경찰이 독립촉성국민회가 관련된 ‘뚝섬 위조지폐 사건’을 수사해 온 것을 조선공산당으로 표적을 바꿔 조작해 발표한 것이었다. 더구나 피의자를 체포한 후 수사가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내놓은 발표였다.

당시 미군정은 위조지폐와 상관없더라도 조선공산당을 공격하고 싶었다. 그래서 위조지폐 사건을 조작하겠다고 처음부터 마음먹고 시작했다. 특히 뚝섬사건에 연루된 독립촉성국민회가 미군정의 지원 단체라 덮어버릴 목적도 있었다. 당시 제1관구 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도 상부에서 내용을 바꿨다는 취지로 기자회견을 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종로서장 이구범,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까지 초기엔 “미군정의 발표를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더구나 미군정은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세우자고 합의한 모스크바 3상 회의 후속으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의 난항을 해결할 묘책으로 삼았다. 이렇게 출발부터 어긋난 ‘정판사조작사건’의 결과는 해방정국을 뒤흔들고 역사의 흐름을 바꿀 거대한 바윗덩어리로 굴러갔다.

야만의 시대, 미군정과 친일 세력이 합작한 사법살인

미군정은 공보부 발표 뒤 3일 뒤 미군 방첩대와 헌병대를 동원해 조선공산당이 있는 근택빌딩을 포위하고 건물 출입을 막아버렸다. 기관지 해방일보를 폐간 수준으로 만들고 일주일 뒤에는 건물 퇴거를 명령했다.

미군정은 정판사조작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기간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현대일보> 등 진보언론사를 폐간 또는 정간 조치했다. 반대로 우익언론은 날개를 달았다. 이미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뒤바꿔 보도한 희대의 ‘가짜뉴스’를 생산한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한성일보> <조선일보>가 자극적이고 편향적인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노덕술을 비롯해 친일 경찰 출신들이 고문으로 증거를 조작해 검찰에 넘겼다. 사건 담당 검사 조재천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고, 판사 양원일도 마찬가지로 반민족행위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친일 경력자 법조인들이 뭉쳐있는 풍경은 얼마나 괴이했을까.

재판부는 법정에서 피고들의 고문 폭로에 귀를 닫았고, 이관술을 비롯해 핵심 피의자로 꼽히는 박락종이 현장에 없었다는 증언과 증거도 철저히 무시했다. 이관술은 검찰이 기소할 때 적시한 10월 하순에 현장에 없고 평양에 갔다는 것을 밝히고 동행자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박락종은 같은 시기 부산에 출장을 가 머물렀고 11월 초까지 있었던 내용을 밝혔다.

그러자 재판장 양원일은 검찰이 조작한 공소장 변경도 없이 범행일시를 10월 중순으로 바꿔 판결했다. 심지어 판사 양원일과 검사 조재천은 공판 막바지에 피고들의 유죄 증거를 수집하겠다며 함께 출장을 다녀오는 일도 있었다. 변호사 윤학기가 “죽은 재판”이라고 성토하고, 이관술이 법정 진술에서 다 짜놓은 재판이었다고 말한 것이 이런 이유였다.

쟁점 1. 불법체포와 고문, 가혹행위 등 불법행위가 있었나

정판사조작사건 재심 심문은 결국 1946년 재판 기소와 재판 과정에 불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진실을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심문에 참가한 검사는 불법체포와 감금, 폭행과 가혹행위가 없었다면서 초지일관 기각을 주장했다.

하지만 청구인 대리인으로 나선 장경욱, 신윤경 변호사는 당시 경찰관이 불법체포 감금을 했다는 내용을 빠짐없이 제시했다. 1946년 당시 신문 기사에 엄청난 고문과 가혹행위가 이루어졌음을 피고인 다수가 호소했다. 또 당시 검사들이 일부 고문을 인정했다는 것도 국회도서관에 자료로 남아있다.

쟁점 2. 미군정 판결을 대한민국 법원이 재심 가능한가

재판부는 심문 초반에 검사와 다른 부분에서 재심 개시를 결정을 바로 하지 못하는 이유를 꺼냈다. 바로 미군정 치하에서 내려진 판결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의 것이니 이를 지금 재심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것이다. 이미 제주 4.3과 관련해 재심이 있었는데 이때도 미군정 기간이었지만 따로 특별법이 제정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이에 변호인들은 미군정의 법령과 행위 등이 대한민국으로 승계된다는 헌법 조문을 근거로 냈고 이후 4.3에 앞선 재판들에 대해서도 재심이 이루어졌다고 의견을 제출했다.

쟁점 3. 당시 재판자료가 부족해 제대로 재심이 가능하겠나

심문 과정에 재판부는 또 다른 의견을 밝혔다. 재심을 하려면 과거 공판 기록이 충분하게 있어야 하는데 판결문과 상고기각결정서를 빼면 상세한 공판자료(검찰 조서 등)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검찰 측이 재판부에 해당 기록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의문이 들게 했다. 오히려 청구인 쪽에서 항소 기각 자료에 나온 조서 내용을 번역해 제출할 정도였다. 4차 심문에서 변호인은 과거에 더 부족한 자료로도 재심이 이루어진 바 있다고 밝혔다.

9월 말, 10월 초 재심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11개월을 기다려 재개된 4차 심문은 15분 만에 끝이 났다. 바뀐 재판부 주심 판사는 늦어도 10월 초까지는 결론을 내겠다고 말했다. 재심 결정은 서면으로만 통보된다. 이제 심문이 열릴 법정은 없다. 물론 양측의 항소가 있을 수 있지만 빠르면 9월 말에 결판이 난다.

4차 심문의 마지막 순서에 재심을 청구한 이관술의 외손녀 손옥희가 변호사를 통해 발언 기회를 요청했다. 손옥희는 새벽 5시 반에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자신의 심정을 정리해왔다. 그 내용을 끝으로 역사를 바로 세울 재심 결정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야만의 시대에 조작된 사건으로 일가족은 물론 일가친척 그 마을 사람들까지 멸시와 사회적 고통 속에서 매 맞아가며 갈등과 냉대를 받으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관술은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주모자로 몰렸기에 이관술 이름 앞에 붙었어야 할 나라 위해 몸 바친 투사는 묻혀버렸습니다. 1930년대 전도양양하고 안정적인 삶을 뒤로하며 세 차례 옥고를 겪으며 오로지 나라 독립에만 꿈꾸었던 숭고한 행적마저 역사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콘크리트처럼 굳어버린 왜곡된 역사도 진실 앞에서는 조금씩 진의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정판사사건이 조작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숨죽이며 조심스럽게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터져 나왔습니다.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어 고등학교 대학교 국사 교재에도 사건이 언급됩니다. 2015년 제대로 연구한 임성욱의 박사학위 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에 이어서 2023년 김상구의 <정판사조작사건> 단행본 연구서도 빛을 봤습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오직 진실을 밝히겠다는 정의의 투사다운 이분들의 뜻이 헛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제 이관술의 유일한 피붙이였던 어머니를 비롯해 저희 가족은 세상을 보는 가치와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울산에서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가 발족됐고, 국회와 성균관대에서 이관술 학술발표를 했고, 국가기록원, 과거사위원회, 보훈처 등 곳곳을 찾아갔습니다.

1950년 대전형무소에서 국가권력으로부터 절차 없는 불법 처형을 당한 데 대한 소송으로 법원의 문턱도 한번 넘어 승소하였습니다. 이제 강대국 미군정이 남기고 간 흔적을 없애주는 책임과 의무는 대한민국 법원, 존엄하신 판사님께 맡겨드리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 주는 형벌은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아픔을 후손들에게 상속하지 않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주시길 타들어가는 간절함으로 말씀드렸습니다.

-2025. 8. 26. 포항서 서울 가는 기차 안에서 손옥희”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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