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오즈의 마법사와 우크라이나

2025-10-03

어린 시절 동화나 영화로 ‘오즈의 마법사(Wonderful wizard of Oz)’를 한 번쯤 보게 된다. 1900년 라이먼 프랭크 바움이 쓴 동화는 영화·뮤지컬·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도로시 역의 주디 갈런드가 부른 주제가 ‘over the rainbow’가 아카데미 최우수 음악상을 받아, 영화는 뮤지컬 영화의 명작이 되었다.

러시아 침략 전쟁으로 신음 중

국가안보 제대로 준비 못한 탓

한국도 과거 유사한 경험 있어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역량뿐

토네이도에 휩쓸려 오즈의 나라에 떨어진 캔자스 주의 어린 소녀 도로시는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착한 마녀 글린다의 조언으로 ‘위대한 오즈의 마법사’가 사는 에메랄드 시티로 떠난다. 여행 중 도로시는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를 만나 친구가 된다. 이들은 각자에게 결핍된 두뇌·심장·용기를 얻는 게 꿈이다. 넷은 오즈의 마법사만 만나면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온갖 역경을 이겨낸다. 죽음의 양귀비 꽃밭을 통과하고, 늑대와 까마귀의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사악한 서쪽 마녀의 부하인 날개 달린 원숭이들에게 납치되어 마녀의 성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고생 끝에 만난 마법사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위대한 마법사라는 건 환상이었다.

그들이 마법사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난 것은 독립 직후부터 서방의 안전보장을 추구해온 우크라이나의 긴 여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오즈의 마법사가 결국 답을 줄 수 없는 평범한 인간임이 드러났듯이, 서방 역시 우크라이나에 안전을 보장해줄 마법을 갖지 못했다. 마법사의 정체성은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 아무런 힘도 없는 권력”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강압에 맞서며 거친 길을 걸어왔지만, 서방이라는 마법사는 결정적인 순간에 무력했다.

세르히 플로히 교수가 쓴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보면 우크라이나는 독립 직후부터 안전보장이 필요했다. 러시아 의회가 1954년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양도한 것을 불법이라고 선언하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은 현실화되었다.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핵무기였다. 그러나 1994년 클린턴 미 대통령의 압박으로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미국과 러시아·영국이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부다페스트 각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각서에는 큰 결함이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공격받을 경우, 군사적으로 보호해준다는 약속이 빠져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각서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앞에서 무력했다.

우크라이나가 찾아낸 유일한 대안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이었다. 2008년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적극 추진했으나, 프랑스와 독일의 반대로 가입은 무기한 연기됐다. 이후 오바마 대통령부터 현재의 트럼프 대통령까지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지지한 적이 없다. 그간 우크라이나는 나토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했다.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이런 취약한 상태에 방치해서 전쟁이 발생한 것이므로 전쟁에는 서방의 책임도 있다.

‘오즈의 마법사’는 도로시 일행이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자기발견과 성장·용기 등 인간 본연의 가치를 부각시키며,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오즈의 마법사’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강대국의 마법같은 외교적 약속은 환상일 뿐, 안보와 평화의 진정한 해법은 우리 자신의 역량에 있다는 것이다. 도로시가 은 구두를 신고, 뒤꿈치를 세 번 맞부딪치며 마음속으로 “집만 한 곳은 없어”라고 말하자, 마침내 캔자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에 은 구두는 서방의 마법이 아니라 러시아의 재침공을 막을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이다.

이것은 한국이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한국전쟁 막바지에 미국이 원치 않던 한·미동맹을 얻어냈다. 그러나 우리는 한·미동맹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다. 경제 기적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키웠고, 그것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했다. 국가의 안전보장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안은 결국 우리 자신의 역량이다. 도로시가 집으로 가기 위해 사악한 서쪽 마녀와 싸웠듯이, 우크라이나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강력한 동쪽 마녀와 싸우고 있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가 말한 것처럼 우크라이나는 누구도 공격할 엄두를 못내는 “강철 고슴도치(steel porcupine)”가 되어야 한다.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한국수입협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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