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미와 베짱이’, 이 유명한 우화의 원전은 ‘개미와 매미’라는 이솝우화다. 이 이야기가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매미가 베짱이로 변한 것이다. 그 핵심은 개미처럼 미래를 준비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고 매미나 베짱이처럼 놀면 굶어 죽는다는 이야기다. 일리가 있지만, 유희를 죄악시하고 노동을 일방적으로 찬미한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일과 노동을 미화함으로써 민초에게 노동을 강제하는 ‘자본의 지배 이데올로기’다.
인류 역사에서 ‘개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돼온 것이 디오니소스(술의 신)와 놀이, 축제다. 나는 이 억압에 반기를 든 ‘인류역사상 최대 축제’를 찾아가고 있다. 몇만명이 아니라 무려 50만명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들이 3일간 좋아하는 음악가들의 연주를 들으며 술 마시고 춤추며 놀았던 엄청난 축제다. ‘음악과 평화의 3일’이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공식 명칭은 ‘우드스톡 음악과 예술박람회’)이다.
‘20세기 최고의 문화적 사건’이라 불리는 이 축제가 열린 곳은 우드스톡이 아니라 우드스톡에서 서남쪽으로 100㎞ 떨어진 베델 숲이다. 뉴욕시 북쪽으로 180㎞ 정도 떨어진 이 숲속 마을로 가기 위해, 새벽부터 300㎞를 달려갔다. 디오니소스를 찾아가는 길이라 그런지, 하늘까지도 술에 취한 듯 폭우를 쏟아부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좁은 시골길을 달리고 있자니, 이 좁은 길로 50만명이 차를 몰고 시골에 집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요즘 인기 절정인 밥 딜런이 자주 출몰하는 우드스톡에서 축제를 엽시다.” 마이클 랭 등 젊은 연예 기획자들은 1969년 초 의기투합해 뉴욕주 우드스톡에서 5만명 정도가 모이는 축제를 열기로 하고 ‘우드스톡 벤처’를 설립했다. 우드스톡시는 많은 젊은이가 몰려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축제 장소는 돌고 돌아 베델로 결정됐다(따라서 이 축제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아니라 ‘베델 페스티벌’이라고 불러야 맞다).

5만명으로 계획한 축제가 50만명의 대축제로
계획은 8월 15일에서 17일까지 3일 입장권을 18달러에 파는 것이었다.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히피 문화에 힘입어 입장권은 폭발적으로 팔렸다. 목표(5만명)의 3배가 넘는 18만장이 팔린 것이다. 소문이 나면서 베델시 주민들이 극렬히 반대하기 시작했고, 시가 장소 임대를 취소했다. 행사는 무산 위기에 처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지역에서 모텔을 하는 한 친구의 주선으로 근처의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목장을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축제 승인 허가가 늦어지면서 입장권을 받을 출입구와 담장을 설치하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이 입장해 자리를 잡고 말았다. 축제는 계획과 달리 무료 축제가 되고 말았다. 5만명의 유료 축제가 50만명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 축제가 되고 말았으니, 디오니소스가 장난을 친 것인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재미있게도 유료 행사가 무료 축제가 되는 바람에 주최 측은 떼돈을 벌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내로라하는 유명 가수와 밴드에 비싼 출연료를 약속하고 초빙했기 때문에 축제는 큰 적자를 봤다. 하지만 페스티벌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세계적인 행사가 되면서 공연을 녹화한 음반과 영화가 대박을 터트렸다. 주최 측은 축제에서 입은 적자를 만회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돈을 벌었다.
‘리치 헤이븐스, 알로 거스리, 조 코커, 조앤 바에즈, 라비 샹카,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CCR, 마운틴, 산타나, 존 시배스천, 더 후, 캔드 히트, 그레이트풀 데드, 제퍼슨 에어플레인….’ 폭우 속에 축제 현장에 도착해 찾아간 기념판에는 축제에서 50만명을 열광시켰던 유명 음악가와 밴드의 이름이 줄줄이 쓰여 있었다. 밥 딜런은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광란의 축제가 열렸던 목장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세워진 기념판을 보고 있자 폭우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인상적인 것은 기념판 맨 위에 그려 있는 로고다. 축제 선전 포스터에 사용한 로고로 연주자가 코드를 잡은 기타 위에 병아리가 앉아 있는 특이한 로고다. 축제가 농장에서 열리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제대로 된 무대, 관중석, 화장실 등 축제에 필요한 기본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큰비까지 와서 땅에 물구덩이가 사방에 생기고 마약이 난무하는 등 문제가 많았음에도 축제는 1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 이외에는 별문제 없이 진행됐다. 그 대답은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드스톡 기념관에 있었다. 기념관에는 적지 않은 사람이 단체 관람을 하고 있었는데, 전시된 사진을 보니 참가자들은 폭우가 쏟아지면 옷을 벗고 빗물을 즐겼고 물구덩이에 뛰어들었다.

문화해방구 넘어 문화와 축제의 코뮌으로
특히 놀라운 것은 5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숙박시설이나 제대로 된 식당도 없는 이곳에서 먹고 잘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부는 가까운 낡은 모텔을 이용했지만, 대부분은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거나 노숙을 했다. 주최 측은 한 작은 회사에 음식 판매권을 줬다. 하지만 음식값이 턱없이 비싼 데다 엄청난 인원에게 음식을 제공할 능력이 없어 문제가 많아지자 군중이 이를 부숴버렸다. 대신 ‘가든(garden) 운동’이 대안이 됐다.

가든 운동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연계를 주장했던 미국 초기의 ‘초월주의’처럼 자급자족 공동체를 통해 이상향을 추구하는 오래된 운동의 일종이다. 1960년대 자본주의적 소비문화를 부정하는 히피 운동이 유행하면서 활발해졌다. 지역의 가든 운동들은 대규모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먹이기 위한 준비를 했다. 이들은 축제 현장에 ‘돼지농장(Hog Farm)’이라는 무료 식당을 열어 참가자들을 먹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재료를 무료로 받고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했다. 정부도 재료를 공수해주는 등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이 많은 인원을 다 먹일 수 있었다. 자본과 이윤의 논리와 대비되는 공동체와 코뮌을 실천한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신군부의 폭력에 맞서 소수 기득권층만 뺀 모든 시민, 즉 ‘민중’이 한마음의 공동체로 뭉친 해방구였다. 1969년 우드스톡은 이와는 다른 또 다른 해방구였다. 이것은 소비문화, 노동문화, 이윤 논리, 전쟁문화로부터 해방된 ‘문화해방구’, ‘문화 코뮌’, ‘축제 코뮌’이었다. 우드스톡 축제는 이제 과거의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의 ‘워라밸’ 속에 살아남아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