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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유럽 패싱'으로 유럽 내 자체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경각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영국 역할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유럽 정상들과의 회동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기로 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이를 의식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스타머 총리는 16일(현지시간) 영국 텔레그래프 기고문에서 "우크라이나에 영국군을 배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렇게 할 의지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은 자체적인 안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 한다"면서도 "미국만이 러시아의 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안전보장은 평화유지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미국이 러시아와 직접 접촉해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추진하면서 유럽 주요국 정상들은 17일 파리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대응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스타머 총리는 회의 결과를 들고 다음 주 미국에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할 예정이다.
스타머 총리는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미국은 앞서 뮌헨안보회의에서 "유럽이 구체적인 제안을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스타머 총리가 유럽 정상들과의 만남에 앞서 이번 입장을 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텔레그래프는 한 내부 관계자를 통해 "스타머 총리가 파리 회의 전 결정을 대중에 공개하기로 한 건 뮌헨안보회의에서 미국이 발표한 성명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영국이 파병 가능성을 언급한 건 지난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후 처음이다.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 평화유지군 창설을 제안한 바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전후 안보 보장을 위해 20만 명 규모의 평화유지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방비 증액' 고심중인 英…"정치적 결과 상당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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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머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에 앞서 국방비 증액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영국 더타임스는 이날 소식통들을 이용해 "스타머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에서 주도권을 갖기 위해 국방비 증액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의 내년도 국방예산은 전체 GDP의 2.3%인 598억 파운드(약 109조원)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목표치인 2%는 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 동맹국에 요구하는 5%에는 미치지 못한다. 데이비드 래미 영국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승리하면 안보 비용이 지금의 세 배 수준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다. 더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14일 영국 군 수장들이 스타머 총리에게 국방비를 GDP 대비 2.65%로 증액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레이철 리브스 재무장관은 난색을 보이고 있다. 유럽 경제가 전반적으로 둔화하며 재정 압박을 받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방비를 증액할 경우 유럽 국가들의 신용 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유럽 국가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GDP 5% 수준으로 올리는 경우 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S&P 분석가 리카르도 벨레시아는 "유럽 국가 대부분이 인구 고령화로 인해 경제 성장이 둔화하고 사회 복지 비용이 증가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방비를 증액하기 위해 사회 복지 지출을 삭감하면 정치적 결과가 상당할 수 있다"고 로이터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