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에 ‘품절 스티커’ 붙였다, 40년 살아남은 사장님 ‘꼼수’

2024-11-14

나는 자영업자다

서울 식당에서 일하면 먹여주고 재워준다 안 카나?

진짜가? 마이 묵을 수 있나?

소년은 늘 배가 고팠다.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1960년대 많은 향촌의 한국인들처럼 그도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니 그의 가난은 자심(滋甚)했다. 젊어 돌아가신 부친의 그늘은 너무도 넓었다. 모친은 간난신고로 그를 키웠지만 5남매의 틈바구니에서 그에게 돌아가는 몫은 적었다. 쇠라도 씹어먹을 성장기 소년은 늘 배가 고팠다.

친구의 말은 복음이었다. 대담하게도 먼저 ‘도망’갔던 친구는 어느새 서울내기가 돼 있었다. 경북 청송 촌구석에서 전해들은 서울 이야기는 별천지의 그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그의 귀를 확 잡아끈 건 “서울에 가면 풍족하게 먹여준다”는 한마디였다.

그는 상경을 결심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자연이 일터였다. 그는 뒷산의 나뭇가지들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땅에 떨어진 가지들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그걸로도 부족해 밤에 톱을 들고 몰래 산에 올라 소나무 가지를 자르기도 했다. 한 무더기가 모이면 그걸 말린 뒤 장에 짊어지고 가서 내다 팔았다. 그때마다 몇십원씩 들어왔다. 그러기를 십여 차례. 그의 손에 600원이 모였다. 노잣돈이 마련되자 그는 미련 없이 고향을 등졌다.

그가 향한 건 서울 명동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만 12세의 어린 소년은 거기서 노동력을 팔았다. 60년 요식업, 40년 자영업 인생이 막을 올린 순간이었다.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서 병천가마솥순대국 대학점을 운영 중인 권영웅(71)씨의 이야기다.

그는 어떻게 그 긴 세월을 버텨냈을까. 그리고 어떻게 아직까지 업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을까. 이제부터 파란만장한 그의 이야기, 그리고 먹고살 것 없어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서울로 향해야 했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 형님들의 슬프고도 고달픈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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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의 어느 날, 12세 소년이던 권씨가 대한민국의 중심, 명동 바닥에 섰다. 하지만 기꺼워할 여력은 없었다. 그에게 명동은 유람이 아니라 생존의 무대였다. 권씨는 이른바 ‘명동 달러 골목’이라 불리던 구역의 한 분식집에서 가냘픈 팔과 다리로 노동을 시작했다.

사실상 미아이자 고아였다. 급여도 없었다. 말 그대로 숙식 제공 조건으로 일했다. 지금 같으면 노동법,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아동·청소년 보호법 위반에 해당할 사안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10년밖에 안 된 세계 최빈국에서 그런 걸 따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년에게는 급여뿐 아니라 제 몸 하나 누일 방 한 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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