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의 그림을 보고 있다. 어둡고 난해하다. 빅뱅 이후 아기 우주와 현재의 지구와 미래 사이 어디쯤에서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것들이 계통 없이 얽혀 막 요동치는 듯, 혹은 춤추는 듯 움직이는 느낌의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림. 전에 본 적 없고 경험한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비현실적 그림인데도, 이상하게 나랑 깊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에 찬 느낌이 든다. 궁금했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작가는 말이 없다. 심지어 “말하면 재미없지 않겠어?” 하는 것 같다. 비밀을 간직한 채 자기만 재미를 보겠다니, 그럴 순 없지. 관찰과 관심 사이에서 헤매며 단서를 찾는 탐정처럼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했다. 미학책부터 낡은 SF 소설, 최신 과학 이론서까지. 그러다 문득, 카를로 로벨리가 내게 왔다.
“대상은 대상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 그 자체로 존재한다!”
카를로 로벨리의 책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나오는 이 문장에 먼저 꽂혔다. 단박에 심장의 떨림 같은 게 전해졌고 그 진동을 더 많이 느껴보고자 그의 책을 모조리 읽었다. 덕분에 그 어렵다는 양자론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 세상에, 리처드 파인먼조차 “양자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 말이다.
한때 존 버거 전작주의를 외치던 나는 이제 카를로 로벨리 전작주의자로서 다섯 권의 책을 읽고 이렇게 정리하게 됐다. “마음으로 읽는 양자론은 어렵지 않다. 세계는 사물들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입자는 거대한 연체동물처럼 역동적인 시공이 결합된 장의 세계와 함께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자들이, 전자기장 같은 장이라 부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끊임없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진화를 만들어 내는 곳. 그런 점에서 세계는 ‘상호 작용하는 실체들의 광대한 네트워크다’, 라고 로벨리는 정의한다.”
그런데 말이다. 재밌게도 양자론이 무르익던 시기의 유럽에서 ‘양자’와 함께 태동한 큐비즘과 피카소를 카를로 로벨리는 탐탁지 않게 본다. 이용당하는 것과 상호 작용은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큐비즘은 우리에게 보이거나 측정할 수 있는 너머 그리기를 포기했다. 오직 우리에게 보이는 것만 이야기할 뿐, 보이지 않는 순간의 광자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그게 큐비즘의 첫 번째 약점이고 두 번째는 큐비즘이 세계의 실체를 ‘자연 바깥에 서 있는 관찰자’ 안에 묶어두려 했다는 점이라고 로벨리는 지적한다. “이 세계는 내가 관찰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존재하는 곳이고, 내가 관찰자를 관찰하면 그가 보지 못한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다”는 점!
그래서 로벨리는 쇠라의 점이나 마티스의 춤에 더 끌렸을 거다. 쇠라의 점들은 공간의 최소 단위인 ‘알갱이’를 상징하고, 그림 속 형상은 화가가 그린 게 아니라, 관찰자인 우리의 망막에서 점들이 섞이며 비로소 ‘창발’하는 하나의 사건이라는 걸 알려준다. 마티스의 춤은 더 설렌다. 세상은 ‘혼자 추는 독무’가 아니라 ‘셋이 추는 춤’이고, 만물이 함께 만드는 거대한 춤사위라는 걸 알게 하는 그림이라고 로벨리는 애정을 담아 말한다.
양자론은 복잡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단순하다. 우리가 관찰할 때만 정보가 늘어난다. 그리고 상호 작용할 때 우리 존재의 범위가 커진다는 진실. 그래서 난 미술계가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나 다른 별들과 춤추기를 바란다. ‘별잇기 예술여행, 카를로 로벨리’편은 그 모든 연결을 위한 첫 번째 스텝이다. 아 참, 왜 셋일까? 상호 작용하는 양자와 관찰자. 나와 로벨리 이야기를 읽는 당신이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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