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 치마 속 옥새 빼앗았다…그 친일파가 사랑한 ‘경성 핫플’

2025-10-12

모던 경성, 웨이터 50년

웰컴 투 경성. 여러분들은 지금 100년 전 서울에 와 계십니다. 당대 최고 ‘핫플’로 손꼽혔던 곳, 경성역 구내식당의 테이블에 앉아 계시는군요. 옆 테이블엔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이 익숙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습니다. ‘구내식당’이란 이름에 속지 마세요. 여긴 나비넥타이 차림의 웨이터들이 자부심을 갖고 서울, 아니 경성 최초로 본격 프랑스 양식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곳이니까요. 지금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코스 1인당 최소 15만원이 넘는 고급 레스토랑입니다. 포도주 한 잔도 곁들인다면 영수증엔 2인 기준 50만원은 각오해야 합니다. 오늘날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에 가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을 테죠.

테이블 숫자만 200개가 넘는 이곳, 옆 테이블에선 울랄라, 유창한 프랑스어가 들려옵니다. 호기심에 고개를 돌려보니 주프랑스 대사인 김용진씨가 동료들과 담소 중이로군요. 테이블을 꽉 채운 손님들은 대개 일본인인데, 그들마저 “조선인이 프랑스어를 저렇게 잘하다니”라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습니다.

아, 하지만 저기 제일 중요한 사람이 걸어옵니다. 우리의 주인공, 한국 최초의 웨이터인 이중일씨가 여러분이 주문한 비후까스(비프 커틀릿)을 갖고 오네요. 그런데 잠깐. 이 비싼 식당에 독립투사는 왜 있으며, 프랑스어는 웬일일까요? 이중일씨가 연유를 전해드립니다. 해방 후엔 김구 선생부터 이승만 대통령도 그를 찾았다고 하니, 더 궁금해지는 걸요. 웨이터가 되기까지 곡절깨나 있었다는 그의 이야기, 시작합니다.

이중일씨의 이야기는 매주 월요일 찾아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다양한 관련 서적과 사료를 참고했습니다. 보완해 추가한 내용은 파란색으로 표시했어요.

기사를 ‘듣고’ 싶은 분들을 위해 AI 구글 제미나이를 이용, 드라마틱하게 읽어드리는 오디오 서비스도 마련했습니다. 중간 부분, 오디오 버튼을 눌러 주세요.

1971년 3월 2일 중앙일보

꿈에도 그리던 경성역 구내식당의 웨이터가 됐지만 나는 아직 풀코스 정식을 맡을 수는 없었다. 경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웨이터 안에서도 서열은 확고하다. 일본인 웨이터들의 잔시중을 들다가, 한동안은 손님들이 남기고 간 찌꺼기 고기가 담긴 접시를 닦는 것이 내 임무였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나는 ‘알라카드(알 라 카르트, à la carte)’라고 불린 하나의 코스로만 끝나는 일품 요리의 서빙을 맡게 됐다. 처음으로 손님 앞에 나서게 된 것이다.

“하이, 하이(はい, はい, ‘네, 네’)-.” 식탁에서 칼질을 하는 손님이 어깨만 움찔거려도 이렇게 바로 “하이” 하고 대령할 수 있도록 손님으로부터 석 자 세 치(약 1m) 쯤 떨어져 꼿꼿이 서 있어야 했다. 손님에겐 항상 45도 각도의 깍듯한 경례를 붙였다. 일품요리를 1년쯤 실수 없이 서빙했더니 정식을 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나마 빨리 정식 서빙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셈이었는데, 이것도 일본인 웨이터들이 조선인 손님을 맡기 싫다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웨이터들은 한국 손님들 시중은 들기 싫다는 듯, 한국 손님이 오면 노골적으로 나에게 “가서 봐주라”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내가 정식 코스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코스 요리 메뉴는 점심과 저녁이 달랐다. 낮엔 수프로 시작해 생선과 빵, 그리고 쇠고기와 닭고기가 나왔으며 후식으로는 아이스크림과 과일로 만든 파이, 푸딩이 나왔다. 밤엔 칵테일과 오트밀 빵, 그리고 수프가 나왔으며 메인 요리로는 생선과 감자(15몬메, もんめ, 일본의 무게 단위로, 3.75그램, 즉 56.25그램), 쇠고기(20몬메), 그리고 닭고기(1마리가 4인분으로 쓰였다)가 샐러드와 함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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