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운동의 등장
근대 초기 소년은 노년과 대비되는 말로 지금으로 보면 어린이와 젊은이라는 뜻을 모두 담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1908년에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소년>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젊은 세대를 포괄했다. 1908년 8월 김규식, 최창식, 윤철선 등이 주도해 창립한 ‘소년동지회’는 같은 해 11월 20일 ‘동지학우친목회’와 합병해 ‘대한소년회’로 출범했다.
이 단체의 구성원은 20대 이상을 포괄했으며, 두 단체의 회장을 맡았던 김규식은 1881년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YMCA 등이 일본을 거쳐 들어와 ‘청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소년에 해당하는 연령이 낮아진 것이다. ‘청년’은 잡지 <개벽> 3호(1920년 8월)에 방정환(1899~1931)이 번역해 실은 ‘어린이 노래’(부제: 불 켜는 이)에서 사용한 어린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게 된다.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서간도와 북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의 민족교육과 무장투쟁은 소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른바 소년독립군의 양성이다. 간도에 정착한 한인사회가 설립한 민족학교에 이어 무관학교와 독립군 양성은 소년 세대를 아우르게 된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박용만이 창설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다. 소년병학교 학생들은 오전에는 노동과 학습을 학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받았다. 소년병에서 성장한 이들은 이후 화와이 국민군단을 거쳐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으로 활약했다.
국내에서 소년들의 독립운동이 커지는 시기는 1919년 3.1만세운동 시기였다. 상하이에서 조직된 ‘한국남녀소년단’은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와 진정서를 보냈다.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소년들도 대거 참여해 피를 흘리고 투옥되었다. 4월 4일 거행된 울산 병영 만세운동의 시작점이 사립 일신학교(현 병영초)로 당시 졸업생이 주축이었던 비밀 병영청년회를 따라 재학생들이 만세 행렬의 선두에 섰다.
울산에서 소년단체 조직은 만세운동 직후 1920년 2월에 창립한 울산불교소년회가 제일 빨랐다. 1921년 9월 11일 <동아일보> 보도에 ‘소년회축구대회’가 울산공립보통학교에서 열렸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참석한 소년단체는 셋으로 천도교, 불교, 기독교소년회였으며 천도교소년회가 대회에서 승리했다. 이 기사를 통해 1921년 이전에 종교기관에서 조직한 소년단체가 있었고 상호교류 행사를 벌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기관과 무관하게 소년단체가 만들어진 것은 동면소년회가 창립된 1922년부터였다.
보성학교 선후배, 김경출과 박두복
김경출은 1910년 동면 일산리 756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언양, 조부는 김재두, 부친은 김석주다. 조부의 이름은 1909년 1차 보성학교 설립 의연금 기부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김재두는 16원을 기부해 개인 기부자 중 일곱 번째로 금액이 컸다. 김경출의 집안이 지역 유지로 재력을 갖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두복은 1914년에 태어났다. 출생지는 동면 일산리 600번지다. 부친은 박학문이고 마을 사람들이 일산상리 마을 대표인 박동실(洞首)로 불렀다. 박도감 집안으로도 불렀는데 집안 어른 중에서 울산목장 관리인 도감을 지낸 이가 있어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인다. 숙부 박학규(1902~1950)는 일본 유학 후 고향으로 돌아와 1923년 보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해방 때까지 울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김경출과 박두복 모두 평평한 언덕 지역을 뜻하는 ‘번덕마을’ 일산상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살았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네 살이었지만 보성학교에서는 바로 위아래 학년 선후배였다. 이는 보성학교 졸업생대장의 졸업생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22년에 사립강습소로 정식인가를 받은 보성학교는 1924년부터 1945년까지 총 20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런데 1924~25년, 1929~41년이 4년제 기간이라 앞뒤의 6년제와 맞추는 과정에 졸업생이 겹치는 해(5회 1929년)와 빠지는 해(1942년)가 발생한다. 또 알 수 없는 이유로 중간에 누락된 연번이 있어 최종 졸업생 수를 계산하면 532명이다. 하지만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거나 전학 가는 경우와 1945년에 문을 닫아 전학 가야 했을 재학생을 감안하면 훨씬 많은 수가 교육 혜택을 받았다고 봐야 한다.
‘보성학교 학사보고’에 기록되어 있는 1937년(소화 12년) 이후 1945년까지 재학생을 살펴보면 1년 단위 재학생을 알 수 있다. 가장 적을 때는 182명(1941년 4년제), 가장 많을 때는 한 해에 356명이었다(1945년 6년제인데 평균을 내보면 236명).
김경출이 3회 졸업이고, 박두복은 4회 졸업이다. 졸업 연도를 보면 김경출이 1926년(대정 15년 / 소화 1년)이고 박두복은 1928년(소화 3년)으로 두 해가 차이가 난다. 졸업생대장 기준으로 1927년은 졸업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의 졸업 연도는 2년 차이가 나지만 보성학교에 다닐 때는 김경출을 비롯해 18명의 다음 학년이 박두복을 포함된 5명이 된다. 보성학교 졸업생대장에서 특이점은 두 사람 모두 졸업한 해의 명단에서 첫 번째에 이름이 적혀있다는 것이다. 명단 작성이 가나다 순서가 아니기 때문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동면에서 소년운동이 활발했던 배경
1920년 이후 종교단체에서 만든 소년단체를 빼고 지역을 기반으로 결성된 사례는 엇비슷한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청년단체가 세워진 후 맺게 되는 연결고리고, 둘째는 강습소와 야학이 세워지면서 민족계몽운동이 성과를 낸 경우다. 동면소년회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먼저 동면지역 청년단체는 보성학교를 준비하며 1920년에 창립한 동면청년회(이후 동면구락부)를 비롯해 방어진청년회와 갑자구락부까지 세 단체가 있었다. 동면의 청년단체 중 가장 활발했던 동면구락부는 토론회와 축구대회를 개최하며 지역 사회를 이끌었고, 1925년 10월 울산군청년연맹을 결성할 때도 다른 단체들을 이끌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소년운동은 청년단체의 핵심 목표 중 하나였다.
노동야학을 거쳐 사립강습소로 인가받은 보성학교는 1924년에 여자야학까지 개설한다. 1925년에는 방어진노동야학이 문을 열었다. 특히 보성학교 교장 성세빈을 비롯해 1920년대 박학규, 장병준(1904~1950), 성세륭, 천호문(1906~1972) 등 교사 대부분이 청년단체의 핵심 임원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동면소년회에는 보성학교 학생뿐 아니라 취학 전 아동도 가입했다는 증언이 있다. 김병희(1918~2017)가 증언한 내용으로, 그는 회고록을 여러 권 남겼다. 그중 유년기 부분에 빠짐없이 등장한 사건이 ‘왜인 건물 파괴’로 1923년에 벌어진 ‘영원한 미제사건’이라고 적었다. 그때는 김병희는 보성학교 입학 전이었지만 소년단에 가입했다고 한다.
“(전략) 취학 전의 어느 날 나는 적호소년단의 일원으로 회비 1전을 움켜쥐고 어느 골방을 찾아가서, 어느 지사의 항일, 독립의 외침을 듣기도 했고 몇몇 동지와 작당해서 왜놈들이 우리들의 약수터에 지어놓은 휴게소 건물을 부숴버리기도 했었다. 소년단원으로서 왜인 건물의 파괴에 가담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몇 동지와 함께 언덕 위에서 바윗돌 몇 개를 굴렸는데, 그것이 굴려내려 지붕을 뚫고 유리창을 부수는 굉음이 천지를 진동했을 때 우리들은 만세를 외쳤다, (후략)” -김병희 <미수옹 회고록>(2005) 중
김병희이 가입한 소년단은 시기상 동면소년회로 보이며, ‘왜놈들이 우리들의 약수터에 지어놓은 휴게소’에 나오는, 바닷가 끝 ‘물탕’으로 불렸던 약수터는 1972년 이후 현대조선소(현 HD현대중공업)가 들어선 뒤 사라진 곳이다. 회고록 속에는 일본어를 ‘국어’라고 칭하는 것이 못마땅해 수업교재 표지의 ‘國’을 ‘日’로 고쳤다는 일화도 들어있다. 참고로 김병희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보성학교에서 4학년을 마치고 동면보통학교로 전학 갔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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