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이었다. 비과학자 출신 김진형 신임 과학기술처 장관은 취임 첫날부터 행보가 남달랐다.
우선 장관 취임사부터 화제를 불렀다. 1990년 11월 10일 오전 과학기술처 대회의실에서 열린 김 장관의 취임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여러분도 놀라셨고 저도 놀랐고, 그래서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김진현 장관은 “대한민국 과학기술이 큰 문패를 달도록 노력하겠지만 내 문패는 달지 않겠다”면서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나는 과학기술처 창립 이후 첫 비과학자 출신 장관이다. 나는 오늘 취임하지만 내일 그만두더라도 과학기술처 근처에 얼씬거리거나 밥을 먹겠다며 여러분 신세 안 지겠다. 둘째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 온 사람으로서 과학기술처 직원만을 위해 일하지는 않겠다.”(대한민국 성찰의 기록)
언론인 출신답게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하루를 일해도 소신껏 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김 장관은 취임 후 직원들에게 “업무와 관련해 일주일 단위로 동향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동향 보고라니? 과학기술처 직원들에게는 생소한 지시였다.
김 전 장관의 회고록 증언.
“나는 직원들에게, 예를 들면 원자력국장은 미국과 일본 등의 원자력국장이 지난 일주일 동안 뭘 했는지 체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1990년 12월 27일 오전 노태우 대통령은 국무총리와 10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대폭적인 내각 개편을 단행했다. 국무총리 서리에 노재봉 대통령비서실장을 임명했다.
신임 노재봉 국무총리 서리는 서울대 정치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교수와 대통령 정치담당특보·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에는 최호중 외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에는 이상옥 주제네바 대사, 교육부 장관에는 윤형섭 교원총연합회장, 체신부 장관에는 송언종 전 전남지사, 체육청소년부 장관에는 박철언 민주자유당 의원, 상공부 장관에는 이봉서 전 동력자원부 장관, 노동부 장관에는 최병렬 공보처 장관, 교통부 장관에는 임인택 상공부 차관, 공보처 장관에는 최창윤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 보훈처장에는 민경배 전 2군사령관을 각각 임명했다. 노 대통령은 또 청와대 비서진을 개편, 대통령 비서실장에 정해창 전 법무장관을 임명했다.,
이수정 청와대 대변인은 개각 배경에 대해 “앞으로 민주 발전과 북방정책 추진, 새로운 경제구조 조정 등에 성과를 내야 하는 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노태우 대통령의 통치 이념을 잘 아는 노재봉 비서실장을 총리 서리로 임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27일 오후 청와대에서 신임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정부는 이튿날인 28일 차관급 20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차관 인사에서 체신부 차관에 윤동윤 체신부 기획관리실장, 과학기술처 차관에 서정욱 한국전기통신공사 부사장, 국방부 차관에 권영해 국방부 기획관리실장, 농수산부 차관에 이병석 감사원 감사위원, 상공부 차관에 박용도 공업진흥청장, 공보처 차관에 이경식 안기부장 제3특보, 국가보훈처 차장에 전희찬 안기부자문위원을 각각 임명했다.
이수정 대변인은 차관 인사와 관련해 “각 분야의 전문성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고 그 분야의 능력 있는 직업 관료들을 대거 발탁했다”고 인사 배경을 설명했다.
윤동윤 체신부 차관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3회에 합격, 1966년부터 체신부 행정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과장, 국장, 실장, 차관을 거쳐 김영삼 정부에서 체신부 장관으로 일했다. 그는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장관 재임 중에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세계 첫 상용화로 한국을 통신 강국으로 발전시킨 주역이다.
서정욱 과학기술처 차관은 국내 처음으로 품질관리를 도입, 한국형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에 적용했다.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텍사스A&M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0년 귀국,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에 참여했다. 국내 최초로 국산 무전기인 K-PRC6를 개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소장까지 승진했다. 이후 KT TDX사업단장 겸 품질보증단장으로 있으면서 1가구 1전화기 시대를 연 주역이다. 김진현 장관은 차관 인사와 관련해 “서정욱 박사를 차관으로 발탁했다. 내가 데리고 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1991년 1월 29일 각 부처는 새해 업무계획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정해창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 “대통령중심제 아래서 대통령의 행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각 부처가 추진하고 싶은 사항을 연두보고 시 대통령 지시 사항에 포함시키기 위해 사전에 비서실과 의견 조정을 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정해창의 청와대 일지)
청와대는 1월 14일 경제 안정과 성장 기반 확충 대책을 경제기획원, 체신부, 과학기술처 등 9개 경제부처 합동으로 보고를 받았다. 각 부처 세부 업무계획은 서면으로 청와대에 보고했다.
과학기술처는 1월 28일 새해 업무계획을 서면으로 보고했다. 과학기술처는 지방화 시대에 대비해 부산·대구·전주·강릉 등 전국 주요 지역에 100만평(약 330만㎡) 규모의 지방과학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남북한 과학기술자 교류와 공동협력사업 등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방화 시대에 대비한 과학기술혁신 확산= 대덕연구단지 조기 완공과 더불어 2001년에 완공할 광주 첨단과학산업연구단지 실시 설계를 올 상반기 중에 마무리 짓는다. 특히 부산, 대구, 전주, 강릉 등 4개 지역에 100만평 규모의 지방과학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한 기본 계획과 실시 설계를 완료한다. 또 '과학관 육성법'을 제정해 지방 과학문화 공간을 크게 늘리고, 광주와 창원 등지에 과학기술원 분원을 설치해 과학기술 인력의 지방 정착을 유도한다.
△에너지기술 자립= 원자력 기술 자립과 안전성 확보에 역점을 두고 우리 여건에 맞는 차세대 원자로와 핵연료 개발을 적극 추진, 1995년까지 원자력발전소의 설계 건설 운전기술자립률을 95% 수준으로 높인다. 고유가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열효율 향상, 절전형 전력기기 개발 등 산업·건물·수송·전기 등 4개 분야에 대한 절약기술 개발에 나선다.
△능동적 과학기술정책 전개= 남북한 과학기술자들의 교류와 공동협력 사업을 적극 추진해 한반도 주변 생태계, 기상변화, 남극 공동 조사 사업 등을 진행한다. 방사광가속기 등 기초과학과 거대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한 중국과의 협력 방안도 모색할 방침이다. 1991년을 '한국과 소련 기술협력 기반 강화의 해'로 정하고 '첨단기술의 도입 공동 연구 개발과 기업화 추진' '기초과학과 원자력 분야 협력' 등을 추진한다.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술 개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범부처 추진 체제를 강화하고 기술 분야별 협의회를 구성·운영해 산업계 수요를 적극 수렴하며, 연구 결과 실용화 촉진을 위해 가칭 '연구개발실용화사업단' 설치를 검토한다. 반도체, 컴퓨터, 생명공학, 정밀화학, 항공우주, 해양기술 등 미래 세계 시장을 주도할 전략기술의 중장기 개발도 추진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 제고= 첨단기술의 편리한 점과 이점·부작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 및 그 감소 방안에 대해 널리 알린다.
1991년 2월 초 김진현 장관은 청와대에 가장 민감한 '부내 인사권 위임'을 요구했다. 장관의 영(令)은 인사권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김진현 장관은 김종인 경제수석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부내 인사에 관한 의견을 전달했다. 자칫 역린을 건드릴 수 있는 민감한 일이었다.
내용은 △과학기술처 인사는 장관에 맡겨 달라. △KIST, KAIST,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는 매우 중요한 기관이니 기관장을 교체할 때는 2명의 후보자를 대통령에게 상신하겠다. △나머지 기관장 인사는 장관인 자신에게 맡겨 달라 등이었다.
'수용이나 거부냐!' 장관의 귄위가 걸린 중대사였다. 얼마 후 청와대에서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이 왔다.
김진현 장관의 증언. “차관을 포함한 부처 내 인사와 연구소 인사를 내 재량껏 했다”
인사권으로 부처를 일거에 장악한 김진현 장관은 미래를 위한 과학기술 정책 구현에 박차를 가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