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일본의 이토추상사 직원 30%는 저녁 8시까지 야근했다. 이 가운데 10%는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다. 그러나 2023년에는 8시, 10시에 퇴근하는 비율이 각각 7%, 0%로 떨어졌다. 대신 대부분의 직원들이 아침 5시에 출근해 회사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고 업무를 시작한다. 오전 5~8시 사이에 근무하면 회사에서 지급하는 1.5배의 아침 수당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에 몰입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토추상사가 2013년부터 시행해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아침형 근무’의 골자다.
올 8월 일본 도쿄 미나토구 본사에서 만난 고바야시 후미히코 이토추상사 대표이사 부사장은 “아침형 근무의 장점은 상사 눈치 보느라 퇴근 못 하는 일이 없다는 것, 고객사 전화가 걸려오지 않아 집중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야근으로 인한 전기요금이나 택시비가 줄어서 오히려 이전보다 비용도 절감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일찍 퇴근해 자녀들의 일상에 함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토추상사는 이와 함께 직원들이 안심하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를 시행해왔다. 이토추만의 독특한 제도 중 하나는 2017년 도입된 ‘암과 일의 양립 지원 정책’이다. 직원이 암 진단을 받을 경우 철저히 치료를 지원하고 암으로 사망하면 자녀들의 대학원 학비까지 자녀 수 제한 없이 지원한다. 또 배우자와 자녀 등 유가족이 희망할 경우 곧바로 이토추그룹에 입사할 수 있다. 고바야시 부사장은 “학비와 입사 지원 모두 이미 실제 사례가 있다”고 전했다. ‘암 진단을 받아도 회사가 보호해준다’는 믿음이 직원들에게는 강력한 동기부여라는 것이 이 제도의 취지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는 가운데 여성 직원들도 안심하고 최대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성 임원도 적극 기용했다. 2021년 35명이었던 여성 임원 숫자는 2022년 46명으로 늘었고 2024년에는 전체 임원 중 여성이 61명까지 증가했다. 최초의 여성 해외 사무소장, 최초의 여성 국내사업부문장 등 ‘최초 사례’도 잇따랐다. 덕분에 이토추상사 여성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2010년 14년 10개월에서 2023년 17년 5개월로 17.4% 상승했다. 같은 기간 남성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 증가율(13.3%)보다 높다.
오카후지 마사히로 이토추상사 최고경영자(CEO)는 이와 관련해 “자신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직원들은 큰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라고 설명해왔다.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이토추의 노동생산성(종업원 수 대비 연결 순이익 기준)은 2010~2023년 사이 5.2배 상승했다. 같은 기간 이토추상사의 주가도 7배나 올랐다. 2021년 기준 이토추상사의 사내 출산율은 1.97명으로 도쿄 평균(1.08명)의 2배에 육박했다. 직원 만족도와 기업 성장, 저출생 극복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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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경영자들의 인식 변화가 핵심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총리에게 저출생 정책을 제안하는 역할을 맡아온 야마사키 시로 일본 내각관방 참여는 한일 양국의 취재진과 만나 “저출생으로 인해 근로자뿐 아니라 소비자도 줄어들어 결국 기업이 생존하기 힘든 사회가 올 수 있다”며 “핵심적인 변화는 기업의 경영진이 책임지고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의 과감한 정책도 기업들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일례로 근로자 1000명 이상인 일본 기업들은 지난해부터 남성 직원들의 육아휴직 사용률을 의무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덕분에 2022년 17.1%에 불과했던 민간기업의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은 지난해 30.1%로 급증했다. 앞서 2016년 시행한 ‘여성활약추진법’은 여성 채용 비율, 남녀 임금 및 근속연수의 격차, 관리직 중 여성 비율 등을 공표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르면 내년부터는 육아·개호휴업법 개정을 통해 3세 미만 자녀를 둔 직원들의 재택근무가 의무화될 예정이다.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기업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만한 정책이라도 일본 정부는 저출생 극복을 위해 과감하게 시행해왔다”며 “한국 정부도 기업과 함께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