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째 산속에 홀로 살고 있다는 한 어르신. 그는 여름이면 옷을 다 벗고 알몸으로 지낸다. 도시에서 온 손님에게 생선 머리를 잔뜩 넣은 카레를 대접하기도 한다.’
2012년 8월 첫 방송 후 14년째 전파를 타는 MBN ‘나는 자연인이다’의 1회 내용이다. 개그맨 이승윤씨(48)는 1회부터 642회를 맞은 지금까지 자연인 옆을 지키며 프로그램의 재미를 끌어내고 있다. 6일 서울 서대문구 한 카페에서 이씨를 만났다.
“첫 촬영이 끝났을 때 프로그램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날것 그대로인 자연인의 모습을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겠다 싶었죠.”
그의 예상과 달리 ‘나는 자연인이다’는 1회부터 화제를 모았다. 그가 우려했던 ‘날것 그대로인 모습’이 오히려 인기 비결이 된 것이다. 귀농·귀촌을 꿈꾸는 중년들은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연인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
프로그램은 나날이 잘됐지만 촬영장에 가는 이씨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낯을 가리는 이씨에게 처음 만난 자연인과 대화하는 건 쉽지 않았다.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출연자가 카메라 앞에서 말을 잘하도록 돕는 것도 부담이 됐다. ‘고라니 생간’ ‘짱돌 넣은 찌개’ 등을 권할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처했다.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들을 대할 땐 공감과 경청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초반에는 방송을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어요. 자연인에게 집중하지 못했죠. 제가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조급함에 쫓길 때보다 그분들의 힘든 일, 기쁜 일을 들을 때 결과물이 좋더군요. 예전에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두려웠다면 이제는 기대됩니다. 여행 가는 기분으로 촬영 현장에 가요.”
자연인에게 배운 것도 많다. 그중 하나는 일상 속 작은 일에서 행복 찾기. 한 자연인이 올해는 고추농사가 잘됐다며 짓던 함박웃음은 순간 그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언제 저렇게 웃어본 걸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란다. ‘도시 아파트에서 편하게 사는 내가 자연인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고 여겼던 그는 마음을 바꿨다.
이씨는 ‘나는 자연인이다’를 찍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2015년 9월, 산속에서 촬영하다가 장수말벌에 쏘였다. 병원에 가던 중 혀가 꼬이며 의식까지 잃었다. 해독제를 맞고 회복했지만 조금 늦었더라면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이었다. 다음날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다시 산에 가 촬영을 이어나갔다. 이후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 하루하루 더 충실히 살자’가 그의 좌우명이 됐다.
농사짓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깨달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농사라곤 전혀 몰랐다. 지금은 자연인을 도우며 씨뿌리기부터 감자·고구마 캐기까지 안해본 일이 없다. 자연인이 텃밭에서 바로 딴 재료로 정성 들여 만들어준 음식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하지만 그는 “나도 산속에서 자연인이나 돼볼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자급자족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는 자연인이다’가 일이 아닌 삶의 일부분이 됐다고 말하는 이씨. 앞으로도 계속 자연인과 함께 시청자들을 만나고 싶단다.
“1000회까지 ‘나는 자연인이다’가 쭉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요즘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방송 덕에 투병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방송에 자연인으로 나온 아버지를 보며 이제야 그를 이해하게 됐다’는 편지를 종종 받는데 말할 수 없이 뿌듯해요. 제가 더 많이 움직이면서 자연 속 삶의 멋과 맛을 전달하겠습니다.”
황지원 기자 support@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