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89화. 쌀의 전설

2025-06-01

악마의 곡물에서 신의 축복, 연대의 상징 된 쌀

지중해에 있는 장화 모양의 땅, 이탈리아. 로마 제국의 중심이었던 반도 북부에 롬바르디아라는 지방이 있어요. 알프스에서 시작된 포강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비옥한 땅 중 하나입니다. 오래전부터 부유하며 인구가 많고 역사·경제·문화적으로 중요해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세력의 침략이 이어지며 자연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기근이나 전염병, 전쟁 등으로 여러 차례 큰 고통을 겪었죠. 중세가 끝나던 무렵, 롬바르디아 지방에서는 흑사병과 기근을 거쳐 큰 전쟁이 이어졌어요. 인구가 줄어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상황에서 거듭되는 싸움으로 사람들은 굶주리던 어느 날, 동방에서 한 상인이 찾아왔습니다.

굶주리던 사람들을 본 상인은 이상한 곡물을 내밀며 심어보라고 권했죠. “이 식물은 물이 고인 지역에서만 자라는데, 한 줌으로도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의심했어요. 왜냐하면 어두운 색깔의 그 곡물은 물이 고인 늪지대에서 자라났기 때문이죠. 병을 가져오는 악마의 땅인 늪에서 자라나는 곡물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곡물이 자라는 땅에선 밤마다 기묘한 소리가 들려오곤 했죠. ‘물귀신이 기르는 검은 씨앗.’ 결국 마을 사제는 이 곡물이 지옥에서 온 것이라면서 모두 태워 버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곡물을 내놓지 않은 한 여성이 있었어요. 가족이 굶주리는 것을 더 볼 수 없던 그는 곡물을 몰래 늪에 심었죠.

악마에게라도 의존하고 싶었던 마음일지도 모르지만, 그 여성의 마음은 결실을 이룹니다. 쑥쑥 자라난 싹은 가을이 되자 황금빛 물결을 이루며 수많은 곡물을 선사했고 덕분에 마을은 기근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죠. ‘이것은 악마의 곡물이 아니라, 신이 내린 은총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곡물을 내려준 신에게 감사했어요. ‘쌀(리소·riso)’로 만든 최고(otto)의 요리, 리소토 축제는 지금도 롬바르디아 각지에서 계속되며 신의 은총을 전해준 동방 상인과 가족을 위해 도전한 한 농부를 기리고 있습니다(쌀+조금(tto)을 더하여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 요리라는 설도 있습니다).

서방의 밀, 아메리카의 옥수수와 함께 인류의 식탁을 책임지는 쌀은 주로 동양의 주식으로 유명한데요. 대략 1만 년에서 6000년 전 처음 재배되었다는 쌀은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한 동북아시아만이 아니라, 동남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대다수 아시아권의 주식이자 아프리카 서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식량으로 쓰였습니다. 오래전부터 재배되었기에 이들 지방에는 모두 ‘신이 내린 곡물’로서의 쌀에 대한 신화나 전설이 남아 있죠. 신의 희생으로 쌀이 생겨나는 이야기도 있어요.

일본에서 쌀은 음식의 여신 오오게츠히메의 시체에서 자라난 다섯 곡물 중 하나입니다. 바다와 폭풍의 신 스사노오가 천계에서 추방되었을 때, 그는 여신을 찾아 음식을 부탁했죠. 오오게츠히메는 코나 입, 항문 같은 곳에서 여러 음식을 내어 차려주었는데, 이를 본 스사노오는 모욕이라 여기며 그녀를 죽입니다. 이후 그 시신 여러 곳에서 작물이 자라는데, 그중 눈에서 자라난 것이 쌀이죠.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에서도 비슷한 신화가 있는데요. 오래전 세상에 기근이 들었을 때, 천상에서 내려온 여신 데위 스리가 자신을 제물로 바쳐요. 여신이 묻힌 땅에서 쌀과 야자, 사탕수수 같은 식물이 자라나 사람들이 구원되니, 이후 그녀를 쌀의 여신으로 숭배했죠.

한 알의 씨앗에서 많게는 300알, 별처럼 많은 곡물이 열리는 쌀은 같은 면적에서 밀보다 2배 이상 많이 수확돼요.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의 많은 인구는 쌀 덕분이란 주장도 나오죠. 하지만 쌀농사는 물과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어요. 각 가정에서 따로 기를 수 있는 밀과 달리 쌀은 마을 사람이 힘을 합쳐 기르는 느낌이 강하죠. 유럽에서 드물게 벼농사를 짓는 롬바르디아 지방에도 집단 노동 전통이 있습니다. 마을 사람이 자발적으로 함께 일하는 아시아와 달리 롬바르디아 지방에선 몬디네(mondine)라 불리는 모내기 여성 노동자들이 농사일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고용됐어요. 동양에서는 여신의 희생으로 생겨나 함께 거둔 쌀이, 이탈리아에선 여성들의 희생으로 수확된 거죠.

하지만, 쌀에는 희생만 있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함께 하는 노력’이 담겨 있어요. 쌀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인 사람들. 힘겨운 일에 맞서고자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나라의 ‘구지가’도 함께 힘을 모은 농경 문화에서 비롯된 노동요죠. ‘거북아 거북아 고개를 내밀어라’ 외치며 함께 고난을 이겨내려는 주문이었죠. 이탈리아의 몬디네에게도 이 같은 노동요가 있었습니다. “이 논은 땀과 눈물로 적셔졌네.” 노동의 리듬이 담긴 노래는 그녀들에게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주었고, 자유의 목소리를 낼 힘이 되었어요. 논의 여신이라 불리기도 했던 몬디네, 모내기 노동에 나섰던 여성들은 고대 여신처럼 희생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잘못된 권력과 침략자에 맞서는 싸움의 여신이자 상징으로 활약합니다. 쌀농사에 필요한 ‘함께 하는 힘’이 ‘함께 저항하는 힘’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죠. 희생으로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이 힘을 모은 노력은 결국 함께 맞서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네 밥상에서 ‘밥심’으로 삶을 책임지는 곡물, 쌀에는 신의 희생, 그리고 사람들의 연대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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