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가지 끝 꽃봉오리 팍 팍, 터지는 봄의 절정

2025-04-20

바람난장

공연이 끝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게 야외 공연이다. 며칠 전부터 하늘만 바라보게 되고 파란 하늘 사이로 먹구름이 짙게 몰려오기라도 하면 걱정이 앞선다. 그러기에 야외 공연은 천지가 받쳐주지 않으면 계획이 십분 펼치지 못할 때가 많다. 한 달에 두 번 의미가 있는 장소를 찾아가며 야외에서 공연하는 바람난장은 이런 예기치 않은 상황에는 맷집도 단단하다.

이번 공연은 봄마다 유채꽃과 벚꽃이 어우러져 꽃이 물결을 이루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녹산로에서 할 계획이었다.

출발하여 공연하는 곳을 반쯤 남겨두었을 때였다. 한 방울 두 방울 연이어지는 빗방울들이 점점 무리 지어 승용차 앞 유리문을 세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난장 시작 한 시간 전이었다. 급히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실내 행사로 계획을 바꾸고 행사를 할 수 있는 카페를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해야만 했다. 이른 아침 시간에 카페를 통째로 빌려줄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바람난장은 기어코 공연에 맞는 카페를 찾아냈다. 신의 한 수였다. 4월은 고사리 철이다. 새벽에 고사리를 꺾기 위해 들판으로 간 사장님을 호출한 것이었다. 그날 꺾어야 할 고사리를 등 뒤로 남겨두고 내려온 카페 사장 부부도 그날은 난장과 함께 흥을 즐겼다. 바람난장은 이런 것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상황으로 사람과 사람이 인연이 되는지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장이기도 하다. 난장의 매력이다.

난장의 문이 열렸다. 김정희 시낭송가는 박후기의 <꽃기침>을 낭송하며 관객들을 난장으로 초대했다.

꽃기침

박후기

꽃이 필 때

목련은 몸살을 앓는다

기침할 때마다

가지 끝 입 부르튼 꽃봉오리

팍 팍, 터진다

처음 당신을 만졌을 때

당신 살갗에 돋던 소름을

나는 기억한다

징그럽게 눈뜨던

소름은 꽃이 되고

잎이 되고 다시 그늘이 되어

내 끓는 청춘의

이마를 짚어주곤 했다

떨림이 없었다면

꽃은 피지 못했을 것이다

떨림이 없었다면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떨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할 때,

한 시절 서로 끌어안고 살던 꽃잎들

시든 사랑 앞에서

툭 툭, 나락으로 떨어진다

피고 지는 꽃들이

하얗게 몸살을 앓는 봄밤

목련의 등에 살며시 귀를 대면

아픈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이어서 문태준 시인의 〈꽃 진 자리에〉를 장순자 시낭송가가 낭송했다.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누군가 4월은 꽃이 피고 지는 계절이라고 했다. 꽃이 지고 나면 꽃 진 자리에 다시 꽃이 핀다.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저 꽃 향, 어질어질하다. 꽃의 향에 취해 멀미가 난다. 그런데…, 그런데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란다. 꽃 진 자리에 앉아 몸살을 앓을 정도로 그리워하게…. 그가 떠난 자리에 앉아 그의 입김, 그의 체온, 그의 목소리를 생각하는 일. 낭송가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나 한 듯 가만가만한 목소리였다가 붉은 꽃잎처럼 격해지다가도 안쓰럽게 따뜻해진다. 차마 비워두지 못한 쓰림이었을까.

부부 두 사람이 함께 어떤 일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정민자·강상훈 연극인 부부는 같이 했다. 낯선 사람끼리 만나 같은 곳을 보기 위해 셀 수 없는 축축한 밤을 보냈을 것이다. 타 부부가 부러워하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부부는 임보 시인의 <우리들의 대통령> 시를 낭송하였다. 한 연 또 한 연을 낭송할 때마다 서로의 눈빛은 깊은 바다의 심연만 같다. 낭송하는 두 사람이 수수해서 더 아름답다.

우리들의 대통령

임보

수많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비상등을 번쩍이며 리무진으로 대로를 질주하는 대신 혼자서 조용히 자전거를 타고 한적한 골목길을 즐겨 오르내리는

맑은 명주 두루마기를 받쳐 입고 낭랑히 연두교서를 읽기도 하고, 고운 마고자 차림으로 외국의 국빈들을 환하게 맞기도 하는

더러는 호텔이나 별장에 들었다가도 아무도 몰래 어느 소년 가장 골방을 찾아

하룻밤 묵어가기도 하는

(중략)

다스리지 않음으로 다스리는,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고 아, 동강난 이 땅의 비원을 사랑으로 성취할

그러한 우리들의 대통령,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카페 안에 있다. 그 안(內)이 아닌, 세상 밖은 태풍이다. 큰 것이 아닌, 소소한 희망을 줄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간절한 바람의 순간이었다. 모두가 그러하듯이.

양전형 시인의 <꽃은 사랑하니까>를 강상훈 연극인이 연이어 낭송했다. 어둠을 몰아내는 꽃. 길모퉁이 돌아 나올 때 가슴에서 눈물처럼 떨어지는 낙화를 보면서도 꽃은 사랑하니까 피나 봅니다.

▲글=윤행순 (시인)▲총감독·사회=김정희

▲시낭송=김정희·장순자·정민자·강상훈

▲노래=김종구·이천희·이마리아·김익수

▲연주=이마리아 ▲사진=허영숙 ▲음향=김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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