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의 부실한 수사 끝에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불송치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검사가 신속히 재수사 요청을 하고 피의자들의 전과 등을 확인한 뒤 출국금지·구속하지 않았다면 피의자들은 분명 도피하거나 직접 보복했을 겁니다.”
‘세종시 집단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 정연수씨(가명)는 12일 한국피해자학회와 전국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가 주최한 ‘범죄피해자가 바라는 검찰 개혁 세미나’에서 이같이 말했다. 정씨는 중학생이던 6년 전 당했던 성폭행 피해를 지난해 2월 경찰에 고소했다. 올해 7월에서야 가해자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그 사이 17개월 동안 8차례나 검찰·경찰을 드나들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정씨는 첫 경찰 수사부터 고통의 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정씨는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불송치 결정을 내렸고, 검찰이 재수사 요청을 한 뒤에서야 재수사를 했지만 이때도 수사는 불성실했다”고 말했다. 검찰의 보완수사로 결국 가해자들이 기소됐지만 그에게 남은 건 2차 가해뿐이었다고 했다.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의 피해자 김진주씨(가명)도 이날 세미나에 나와 자신의 사례를 털어놨다. 그는 “똑같은 피해를 당해도 경찰, 검찰, 법원을 거치면서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복불복”이라며 “범인이 도주하거나 센터 연계 도중 누락되는 등 일련의 과정이 버겁고 정보가 무겁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어 “인터넷에서는 범죄피해자 관련 법률이나 변호사를 구할 때조차도 정보를 가려내기 힘들었다”며 “범죄피해자 지원은 오프라인으로 신청해야 하거나, 대기시간이 긴데 연락조차 무서운 범죄피해자에겐 힘든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전담 경찰관이 지정되면서 해결되나 싶었지만 경찰도 검찰로 이송되고 나서는 관할이 끝났다고 말했다”며 기관 간 단절을 지적했다.
이날 열린 세미나는 최근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추진 중인 검찰개혁안과 관련해 범죄피해자들의 입장과 의견을 듣기 위해 마련됐다. 정씨와 김씨 등 범죄피해자들과 전문가들은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검찰청 폐지 및 중대범죄수사청 설치,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 등에 대해 우려와 지적을 쏟아냈다.
먼저 검찰청 폐지와 보완수사권 폐지가 경찰 수사에 대한 통제와 보완 없이 이뤄질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왔다. 경찰의 수사 부실 문제 등을 막을 장치가 없어진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등 활동을 해온 ‘리셋’의 정책법률연구팀 유영 활동가는 “N번방 사건 등을 계기로 디지털 성범죄 심각성이 커졌지만 경찰 수사 지연은 계속됐다”며 “리셋이 지원했던 사건 중에는 신고 후 담당 경찰수사관 배치만 1년이 넘게 걸린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디지털 성범죄 특성상 증거 은닉·인멸이 너무 쉽지만 이를 막을 구속 수사와 압수수색은 검사의 지휘와 협력 없이는 어렵고 보완수사 요구와 영장 보강은 경찰 초동수사의 빈틈을 메우는 중요한 통로”라며 “검찰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보완수사권을 폐지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그간 숱하게 발생한 경찰의 부실수사로 경찰을 해체하자고 하진 않지 않나”라며 “오히려 필요한 건 각 기관의 전문성 강화와 인력 충원, 범부처적 협력이다”라고 강조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여성인권위원회의 안지희 변호사는 “검사가 경찰의 불송치 사건에 대해 재수사 요청을 하는 경우에도 오류를 시정하지 못해 검사가 보완수사로 바로잡은 사례들이 다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검사가 재수사 요청을 하면 불송치 결정을 한 수사관이 재수사를 하게 돼 시정 가능성이 작다”며 “특히 직접증거가 부족한 성범죄의 경우 보완수사 요구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고, 반복되는 보완수사 요구는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가중한다”고 주장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활동가 연대자D씨는 “그나마 검찰 보완수사를 통해 가해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진 사건들이 있다”며 “경찰에 수사 종결까지 맡기면 법리 해석이 제대로 안 됐을 경우 누가 책임지느냐”고 했다.
범죄 피해자 다수를 대리한 형사전문 변호사들은 수사 지연이 심화될 수 있다고도 걱정했다. 김은정 변호사(법무법인 리움)는 “수사기관 간 ‘사건 핑퐁’ 속에서 관심에서 멀어지고 소외되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며 “수사기관의 수사 범위에 대한 분쟁 속에서 사건 처리가 더 장기화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이미 수사권 조정 이후 사건 처리가 지연돼 사기 피해자가 직접 사설탐정을 고용해 가해자의 소재지를 확인해 경찰에 전달하거나, 수사·재판이 장기화돼 범죄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의 시효가 만료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검찰청을 폐지하고 중대범죄수사청으로 바꿔 행정안전부 아래에 두는 개정안 내용과 관련해선 “행안부 산하에 중수청과 경찰청이 함께 있어 업무가 중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법률 상담 없이는 어느 수사기관에 고소·고발해야 할지 판단하는 것조차 쉽지 않고 부담해야 할 비용도 늘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형사사법시스템 변화의 직접적인 적용을 받게 될 범죄피해자 등 국민들의 목소리가 개혁 논의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크게 제기됐다. 김진주씨는 “검찰개혁 관련해서 범죄피해자의 얘기가 빠진 채 논의되고 있어 화가 난다”며 “왜 정부가 바뀔 때마다 그들만의 목적 때문에 이런 변화가 생기고 국민들이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말했다. 정작 범죄피해자 지원 절차에 대해선 논의가 불충분하다고도 했다. 김씨는 “범죄라는 것이 피해자가 없으면 반드시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모든 사안에서 피해자가 열외돼 우리는 국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경찰부터 시작해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룬다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대자D씨는 “2025년 현재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검찰개혁안에서 피해자는 또다시 배제되고 있다”며 “부실수사와 수사지연, 수사단계 비용 증가와 인권침해 등 또다시 예상되는 문제점이 있지만 개혁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 정도로 취급받고 있다. 비판하는 이들은 ‘친검’이나 ‘내란세력’으로 몰리는 실정”이라고 했다. 정연수씨도 “검찰개혁이 정치적 싸움이 아닌 국민을 위한 것이 되기 위해선 기계적으로 수사권 이동만을 논할 게 아니라 그 권한을 행사는 구조와 시스템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논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