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사이먼 존슨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무차별적 관세 정책에 대해 “국제경제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미국 경제에도 피해를 줄 전근대적 발상”이라면서도 “트럼프 역시 이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존슨 교수는 12일(현지시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정책은 근본적으로 미국이 동맹과 전 세계 경제·안보의 구심점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며 이같이 평가했다. 다만 “트럼프의 정책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될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트럼프 2기를 예측하려면 관세, 이민정책, 영토확장 발언 등을 개별적으로 분석하기보다 전체를 봐야 한다”고 했다.
존슨 교수가 제시한 단서는 방위비 분담금 인상이다. 그는 “트럼프는 이미 경제와 안보를 패키지로 보고 있다”며 “트럼프 전략의 목표는 미국의 경제와 안보 분야에서의 역할을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재정립하는 쪽에 맞춰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존슨 교수는 이러한 전략적 구상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딴 ‘네오닉스니즘’에 비유했다. 그는 “모든 대통령들은 미국의 전략적 지원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닉슨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며 “현실론자이자 재선 기회가 없는 트럼프는 이를 2기 행정부의 가시적 목표로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내세우는 관세 등에 대해선 닉슨과 유사하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닉슨은 1971년 금태환 중단과 10%의 보편 관세 부과 방침을 밝혔지만, 주요국이 ‘스미소니언 협정’을 통해 통화 가치를 절상하자 40일만에 관세 계획을 철회했다. 존슨 교수는 “트럼프의 목표는 세계 각국이 최소한 핵(核)을 제외한 재래식 군사력의 측면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규칙을 만드는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무역 적자 개선을 목표로 했던 ‘닉슨 쇼크’와 달리 ‘트럼프 쇼크’가 안보와 결부돼 진행될 수 있다고 했다.
경제와 안보 모두에서 대미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대해선 “한국이 강한 재래식 전력을 확보한 동맹국이자 핵심 무역 파트너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며 “트럼프가 구상하는 대부분의 경우의 수에서 한국의 번영은 목적 달성을 위한 핵심 전제 조건이 될 거라고 낙관한다”고 강조했다.
닉슨과 유사한 ‘트럼프 독트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닉슨은 경제와 안보에서 미국의 전략적 지원 여력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모두가 이에 동의했지만, 실제 정책으로 구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현재 트럼프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에 우크라이나 방위를 위한 기여를 요청하는 것을 무조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기도 어렵다.”
관세를 내세운 트럼프의 목표는 무엇인가.
“세계 각국이 재래식 전력에서는 스스로의 비용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체제를 구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군사적 안보의 개념이 이미 경제가 융합된 경제안보로 바뀐 상황에서 동맹국의 역할도 경제와 안보를 별개로 봐선 안 된다.”
트럼프의 국방정책 수립의 실세로 평가받는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차관은 지난해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주한미군의 역할을) 북한이 아닌 대(對)중국 견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한국이 홀로 북한과 대치할 가능성에 대비해 “자체 핵무장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었다.
동맹국에 대한 관세 부과는 무슨 의미인가.
“동맹과 우호적 무역 파트너에게 징벌적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국제 경제 시스템을 변화시키고, 미국에도 인플레이션 압력 등 실질적인 피해로 이어진다. 트럼프도 미국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동맹국과의 협력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관세는 목표가 아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시기에 한국은 리더십 공백 상황에 처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포용적 경제 제도와 대표성과 책임성을 갖춘 민주주의 체제에서 경제는 더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이러한 경제의 작동 원리에 도움을 주는 결정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통해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룬 한국의 회복력에 기대를 걸고 있다.”
존슨 교수는 2012년 저술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공정한 경쟁을 인정하는 ‘포용적 제도’를 구축한 남한과 소수 집단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착취적 제도’를 지닌 북한의 정치·경제적 제도가 극명한 번영의 차이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 간 빈부격차의 원인을 사회 제도와 연결해 분석한 연구로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부정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트럼프 정책의 상당수가 미국과 국제사회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이 정책이 지속된다면 ‘혼돈의 4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상식적 정책이 지속될지에 대해선 미지수라고 말하고 싶다. 트럼프의 정책 역시 특정 시점 또는 특정한 목표를 달성할 경우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어떤 대응을 해야 하나.
“트럼프가 어떤 정책을 펴더라도 강한 국방력과 경제력을 가진 동맹인 한국이 번영을 이뤄야 한다는 것은 전략적인 대전제가 될 것이다. 다만 당분간 확대될 불확실성에 대비해 미국에 의존해 주도권을 유지하는 것보다 다양한 무역과 전략적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한국 스스로 민주주의 회복력을 극대화하며 민주주의 국가들과 더 깊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출발점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