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수 바꾸기 드라마가 성공하는 듯했다. 결승전 우승자를 갈아치우는 역모에 의원들이 밤을 꼬박 새웠다. 약체 김문수를 뽑은 이유는 전격 바꿔치기를 순순히 받을 거란 예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빗나갔다. 그는 외압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김문수든 한덕수든 자신의 인생곡을 목청껏 불러 젖혀도 유권자들의 계엄 적대감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을 텐데 이 무리한 시도로 국힘이 살아난다고 믿었을까.
적대정치 끝에 무너진 한국 정치
민주당은 진격, 국힘은 방어 궁색
대결 정치로 본질 회복 어려워
국가정체성 확인하는 계기 돼야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K방산처럼, 민주당의 솜씨는 총잡이처럼 빠르고 화력은 막강하다. 공포의 진격은 거침이 없다. 사법부는 대법원장과 판사 탄핵 위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삼권분립은 폐기된 지 오래, 사법과 행정은 찍소리 못한 채 질풍노도와 같은 입법질 눈치만 살필 뿐이다. 민주당은 내친김에 이재명 완전 방탄에 돌입했다. 사법의 손이 닿지 않는 초원지대로 이재명을 이주시키는 ‘방탄위원장’ 정청래의 기획은 일품이다. 대통령 대상 재판을 아예 정지시키고(헌법 제84조),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조항(250조 1항)을 고쳐 이재명 혐의를 지워버리는 것. 사법 길들이기다. 민주주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 무슨 민주주의?
이참에 정당 명칭을 바꾸면 어떨까 한다. 민주당은 입법질당, 국힘은헛발질당으로. 정당의 행위가 이토록 공포심을 유발하고, 허겁지겁 후보를 갈아치우는 사례는 한국 정치사에서 최초일 것이다. 권력을 두고 다투는 정당정치가 이 지경이 됐다. 계엄 작란죄(作亂罪)를 짊어진 국힘은 진심 회복에 성의를 보였어야 했다. 석고대죄가 이런 때에 적합한 말이다. 고지를 점령한 민주당은 민주주의의 가드레일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에서 공세의 강도와 방향을 조절해야 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윤리와 기본 이념이 증발한 상태에서 치르는 대선 민심은 흉흉하다.
민주당의 진격은 기병대의 질주를 방불케 한다. 리바이어던의 족쇄가 풀리면 시민사회는 맥을 못 추고 국가권력이 널뛰는 상태가 연출된다는 세계 학자들의 경고에 한국이 가장 가깝게 접근했다. 민주주의가 경계해야 할 보복과 척결, 독주와 독단 같은 적대 정치적 풍경이 연장될지 모른다. 윤석열 정권의 적대 정치가 만들어놓은 덫에 걸려 이런 사태까지 왔다면 비록 대선 정국이나마 이에 대한 범정치권의 반성이 절실하다.
국힘의 대선 캠페인은 반명(反明)과 개헌 이외에 아직 분명한 것이 없다. 이재명 후보는 지역 맞춤형 공약을 쏟아놓는 중이다. 양곡관리법, 햇빛연금, 지역화폐 등 기본소득 범주에 속하는 공약들이 유권자를 매혹한다. 성장과 고용 약속은 당연한 것이기에 유권자들은 외려 분배와 평등, 세율과 민생을 겨냥한 어떤 멋진 공약이 나올 것인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대체로 보수의 주머니는 빈약하고, 진보엔 공약리스트가 쌓였다.
한국호가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표류하고 있음은 세계인이 다 안다. 대선은 돛대와 삿대를 갈아 끼우는 일이다. 그렇다고 경로를 완전히 바꾸거나 오던 길을 역행하는 일은 없기를 기대한다. 표심을 얻기 위해 국가정체성을 교체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국힘이든 민주당이든 제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포퓰리즘’과 ‘시민운동의 포섭정치’에서 멀어지라고 권하고 싶다. 현대의 정치가들이 포퓰리즘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극단적 대립양상 때문이다. 돈을 주고 표를 사서라도 적을 제압하려는 유혹, ‘주고받는 정치’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기반마저 무너뜨린다. 필자는 이전 칼럼에서 유럽형 황금삼각형(gloden triangle)을 강조한 바 있다. 성장, 복지, 고용의 선순환 속으로 노동자를 끌어들이는 사민주의형 발명품이다. 며칠 전 IMF는 5년 후 예측보고서에서 정부부채비율이 사민주의 국가는 낮아지고 한국은 선진국 평균치보다 5%p 높아질 것으로 예견했다.
시민단체의 정치적 동원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보편적 이익보다 특정 세력을 옹호하는 주창그룹으로 변질한지 오래다. 시민운동의 본질은 시민편익의 보장과 정권 감시다. 정권과의 동종교배는 시민단체를 호위부대로 전락케 만든다. 그런데 많은 시민단체들이 출전 준비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범진보진영의 반미·반일 성향은 걱정이다. 진보정당들은 범진보 연합을 구축해 총선 비례대표제 강화와 원내 교섭단체 참여 확대를 도모하는 중이다. 통진당, 정의당이 생환하고 반미·반일 성향은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김대중 이후 진보정권이 평양에 거듭 이용당해왔다는 뼈아픈 기억이 잊힐까. 트럼프의 거센 압력을 피해 대륙친화적 정치로 돌아선다면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될까. 한국은 해양국가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데에 6·25 전쟁을 겪었다.
대선 D-21일, 두 정당은 제발 적대정치가 낳은 표류상태를 희망찬 항해로 바꿔 달라. 정치권의 투쟁으로 국민들이 마음고생을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대선은 시간의 무늬를 바꾸는 계기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