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 아웃] 지옥에서 보낸 한철

2024-12-19

영화는 현실과 같은 속도를 내지 못한다. 언제나 한 걸음 아니 두 걸음 이상 늦다. 영화가 등장할 때 사건은 결국 과거의 것이 된다. 다큐멘터리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사건을 최대한 빠르게 따라잡으면서 잰걸음으로 달려온 AP통신의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가 촬영한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최악의 조건 속에서 영상은 통신사를 걸쳐 전 세계에 송출되어 러시아의 만행을 알렸다. 2023년 선댄스 영화제와 96회 아카데미는 장편다큐멘터리 상으로 목숨을 건 노고에 헌사 한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산업도시이자 러시아 국경 50Km 거리에 위치한 마리우폴. 전운이 감돌자 시민들의 불안은 극에 달한다. 기어이 시작된 러시아의 공격. 전쟁 발발 8일 만에 전기와 통신과 인터넷이 모두 끊겼다. 러시아 군의 민간인 학살과 산부인과병원 포격 사실을 외부에 알려야 하고, 전 세계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 그러나 연락할 수단이 막막하다. 와중에 일부 군중은 식료품점과 잡화점을 약탈하고 절망과 공포만이 도시를 감싼다. 설상가상으로 민간인을 외부로 내보내는 안전통로 일명 ‘회랑’의 설치마저 결렬 되었다. 시민은 무너진 잔해 앞에서 오열하거나 제대로 된 대피소도 없이 건물 지하에서 울음을 참을 뿐이다.

“전쟁은 마치 X선 같아요. 사람의 내부를 보여줘. 착한 사람은 선한 일을, 나쁜 사람은 악한 일을 저지릅니다.” 병원을 지키는 의사의 말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劇化)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라고 말했다. 스펙터클을 배제하고 현전에 집중해야한다는 얘기일 터. 다큐멘터리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어디까지, 얼마나 참상을 전달해야 이 전쟁을 알리고 멈출 수 있을까.

민간인과 병원과 어린이와 노약자 시설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제네바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하고도 조작된 영상이라고 발뺌하는 러시아를 압박할 증거영상들이 차고 넘치는 마리우폴의 결사항전은 그래서 더욱 비탄의 연속이다. 태아와 함께 사망한 산모와, 18개월 된 영아와, 축구 도중에 폭격을 맞은 15살 소년의 시신 위로 부모의 절규가 덮일 때 “신이 있다면 도와주소서”라는 간절한 기도조차 무기력의 증거가 될 따름이다.

가슴 벅찬 순간도 있다. 영화가 1시간 6분을 통과하는 지점, 다리가 절단된 산모의 출산 장면. 30여 초 동안 숨을 쉬지 않아 의료진을 가슴 졸이게 만든 아기의 울음소리가 퍼질 때, 영화는 전쟁 속에서 피어난 생명의 위대함과 숭고를 새긴다.

개전 86일 만에 마리우폴은 함락되었다. 민간인 사망자는 25,000명으로 추산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마리우폴 시민의 시신을 임시 매장하던 인부의 말이 사무친다. “이건 끝내야만 해요. 누가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전쟁을 시작한 자들은 모두 죽어야 해요.” 나도 동의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동의해달라는 간절한 요청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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