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형 동물감염병, 살처분 일변도 벗어나자

2025-11-20

겨울철로 접어들면서 전북 지역의 주요 철새 도래지에 이어 가금 농장에서도 조류인플루엔자(AI) 항원이 검출됐다. 앞서 지난 9월에는 경기도 파주시 토종닭 농장에서 올가을 들어 첫 고병원성 AI가 확인됐다. 예년보다 1~2개월 빠르기에 방역 당국과 농가들이 긴장하고 있다. 지난 봄에는 전남 영암군 한우 농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해 한우 수천 마리를 살처분했고, 인근 무안군 돼지농장에서도 추가 확진됐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은 올해 들어서만 전국에서 4건 발생해 방역 당국과 농가를 힘들게 했다.

국경방역, 여행객에도 확대 필요

유전자 기반 진단기술 활용하고

속도전을 정밀 방역으로 바꿔야

방역 당국이 병원균을 신속하게 차단하기 위해 살처분과 이동제한 조치를 단행하고 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농가와 지역사회 몫이 된다. 더구나 일부는 신고 지연이나 절차 미비를 이유로 보상금이 대폭 삭감되면서 농가들은 경제적 타격과 심리적 고통의 이중고를 호소한다.

이런 모습은 더는 낯설지 않다. 2010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초대형 구제역 사태 당시 무려 35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을 살처분했다. 그 이후에도 고병원성 AI가 해마다 되풀이되다시피 하면서 누적 살처분 규모는 1억 마리를 넘어섰다. 정부는 수조 원대의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가축 전염병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농민에겐 회복하기 힘든 상처가, 국민에게는 방역정책에 대한 불신이 남았다. 지금의 방역 체계는 국가 재정과 축산업 모두에 막대한 부담만 안길 뿐 근본적 해결책이 못 되고 있다.

정부는 국경방역의 일환으로 수의사나 축산 관계자에 한해 공항과 항만에서 발판 소독과 신발 소독을 의무화하고 있다. “축산업 종사자로부터 전염병 전파 위험이 크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보여주기 조치다. 가축전염병 전파는 특정 직군에 국한하지 않는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일반인, 각종 물류와 택배, 심지어 반려동물 이동까지도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일본·대만 등 방역 선진국들은 이런 방식의 소독을 시행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입국자를 대상으로 휴대품 검사를 철저히 하고, 탐지견과 X레이 장비를 동원해 육류·유제품 등 축산물 반입을 원천 차단한다. 위반하면 수백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반복해 위반하면 입국 제한까지 검토한다. 방역의 초점은 ‘사람의 직업’이 아니라 ‘병원체를 옮길 수 있는 위험 물품’에 맞춰져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여전히 수의사나 축산 관계자만 공항에서 따로 소독을 받는 장면이 반복된다. 일반 여행객의 가방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축산물은 느슨하게 관리된다. 바이러스는 직업을 가리지 않는다. 국경방역은 특정 집단을 상징적으로 소독하는 방식이 아니라 병원체가 실제로 이동하는 경로를 차단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현행 방역정책은 오랫동안 ‘빠르게·과감하게’를 원칙으로 해왔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대규모 살처분과 이동제한을 곧바로 시행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일괄 대응은 효과에 견줘 사회·경제적 비용이 지나치게 크다. 수조 원의 보상금을 투입하지만, 질병은 사라지지 않고 반복된다.

이제는 패러다임 전환이 불가피하다. 유전자 기반의 정밀 진단기술로 감염 개체와 비감염 개체를 구분하고, 공간정보시스템(GIS)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역학조사로 위험지역과 안전지역을 가려내야 한다. 나아가 고위험 지역에는 광범위하게 선제적으로 백신을 접종하고, 면역 모니터링을 병행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세계동물보건기구(WOAH)도 살처분 일변도의 대응에서 벗어나 위험 평가에 따른 정밀 방역을 권고하고 있다. 일본·대만과 유럽 여러 국가가 이미 이런 과학적 체계를 도입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다.

재난형 가축전염병은 단순히 축산업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 건강, 식품안전, 나아가 국가 경제와 직결된 국가적 재난이다. 따라서 국경방역은 형식이 아닌 실질, 속도가 아닌 정밀성으로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농가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며,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지속가능한 방역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제는 방역정책이 속도와 과감성에서 벗어나 정밀성과 과학성으로 바뀌어야 할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허주형 대한수의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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