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 쿠데타로 집권, 100년 동안 무신정권

“펜은 칼보다 강하다.” 수십 년 전 영어 교재에 단골로 나오던 문장이다. 1839년 영국 작가 에드워드 불워리턴이 한 말이라고 한다. 칼은 폭력을 상징하므로, 비폭력적인 여러 수단에 비해 폭력이 갖는 한계성을 일깨운 말이다. 폭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명언도 있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런데 동양에는 이런 종류의 격언이 없다. 칼의 위력과 쓸모를 인정해서가 아니다. 문치(文治)의 전통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구태여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정치의 방법으로 덕치(德治)와 법치(法治)를 비교할 뿐, 힘에 의한 통치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전통을 가진 우리 역사에 아주 예외적인 시기가 있었다. 바로 고려의 무신정권 100년이다.
정변 일으킨 정중부·이고 등 분열
주역 3인방 10년 안 돼 모두 피살
안하무인 의종에게 폭발한 무신들
“문신 죽여라” 초점 바꿔 권력 찬탈
무책임한 권력에 곳곳에서 민란
문벌 붕괴 등 암흑기 속 순기능도
사소한 감정 싸움이 발단

1170년 8월 30일, 정중부·이의방·이고 등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문신들을 학살하고 새 국왕을 앉힌 다음 권력을 장악했다. 우리 역사에 이런 정변이 흔치 않지만 아주 없지도 않았다.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100명이 넘는 대신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일이 있고, 고려 초에도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세운 적이 있다. 하지만 정중부 등의 정변은, 그렇게 해서 수립된 무신정권이 1270년까지 100년이나 지속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다르다. 정변을 일으킨 사람들 누구도 자신의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을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날의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 대개 작은 불씨에서 비롯되듯이, 사소한 감정싸움이 발단이 되었다.
그날 국왕 의종은 개풍의 흥왕사에서 하루를 보내고 장단의 보현원으로 이동해서 하루를 더 머물 참이었다. 이렇게 돌아다닌 것은 그저 술 마시고 놀기 위해서였다. 왕이 측근 문신들과 연회를 즐기는 2박 3일 동안 밤늦도록 밖에서 경비를 서야 했던 무신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의종이 그걸 눈치채고 나름 위로해 준답시고 무신들에게 수박희(手搏戱·맨손 무예) 대련을 시켜 이긴 사람에게 상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젊은 문신 하나가 이조차 시기해서는 대련에서 진 대장군 이소응을 조롱하며 뺨을 때렸고, 왕과 문신들이 그걸 보고 오히려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이 장면에서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날 『고려사』는 “왕을 따르던 신하들과 환관들이 해를 입어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계획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났고, 그런 만큼 취약한 구석이 있었다.
우선 반란군의 병력이 많지 않았다. 국왕의 놀이 행차를 호위할 정도의 병력이었으니 많아야 수백 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보현원에서 일이 터졌을 때 문신 김돈중이 취한 척 말에서 떨어져 도망쳤다. 그가 개경으로 달려가 군대를 끌고 왔더라면 이 쿠데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개경으로 가질 않고 산에 들어가 숨었다. 반란군이 김돈중의 개경 집을 염탐해서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안심하고 궁궐을 공격해서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군인들이 “문신들을 다 죽여라”라고 소리치며 길거리를 뛰어다녔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눈에 띄는 대로 잡아 죽였다. 며칠 동안 개경은 광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산에 숨었던 김돈중도 현상금을 노린 하인의 고발로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그의 비겁함이 대량 살육을 막을 기회를 놓치게 했고, 역사의 물꼬를 바로잡은 인물로서 아버지 김부식만큼 유명해질 기회를 날려버렸다.
‘차별 때문에 쿠데타’는 반만 맞는 말

무신들의 정변은 문신과의 차별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지만, 이 설명은 반만 맞는다. 당시 문신과 무신은 신분부터 달랐다. 최고 신분인 귀족부터 지방의 향리들까지 지배층은 누구나 문신이 되고자 했다. 무신은 향리 가운데 과거 공부의 가시밭길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평민 중에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되는 자리였다. 출발부터 달랐고, 능력에도 차이가 있었다. 그때까지 글을 읽을 줄 알고 병법을 공부한 무신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강감찬이나 윤관처럼 문신이 군대를 지휘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시대에 문신과 무신은 새의 양 날개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차별은 당연했다. 또 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이 전체 무신을 대표하지도 않았다. 의종은 총애하는 신하들과 어울리며 제멋대로 왕 노릇을 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관직을 주고, 반대하는 신하에게는 죽여서 젓갈을 담그겠다고 협박하고, 심지어는 꿈에서 봤다며 고집을 부렸다. 임금의 총애는 신하의 아부와 맞바꿔졌다. 주변에 아첨꾼이 몰려들었고, 그중에는 환관과 문신 그리고 무신도 있었다. 정중부는 그런 무신을 대표했으니, 그의 처지가 총애 밖에 있는 문신보다 못했다고 할 수 없다.
정변은 측근세력 내부의 충성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중부 등은 “문신을 죽여라”라는 한 마디로 대중의 광기에 불을 질러 문무 대결로 프레임을 전환시켰다. 문신들의 빈자리는 무신들의 전리품이 되었고, 무신을 차별하는 제도도 철폐되었다. 그러는 사이 살육은 계속되고 의종 살해에서 정점을 찍었다. 천민 출신의 이의민이(그도 의종의 총애를 받아 출세한 무신이다) 의종을 유배지 경주로 찾아가 척추를 꺾어 죽이고 시신을 연못에 던져 유기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반대자들을 협박하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광기는 불안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폭력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지만, 또 다른 폭력에 권력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 이 말을 알았던 것일까.

불법적인 수단으로 얻은 권력은 법과 제도로써 보장되지 않는다. 최고 권력자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고, 늘 경쟁자를 견제해야 했다. 쿠데타 직후 정중부·이의방·이고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이의방이 이고를 죽이고, 정중부가 이의방을 죽였다. 정중부도 경대승에게 죽임을 당해서 10년도 되지 않아 쿠데타 주역 셋이 모두 비명에 사라졌다. 경대승이 병사하고 쿠데타 당시 행동대장이었던 이의민이 권력을 잡았으나 그 역시 최충헌에게 살해당했다. 최충헌은 경쟁자를 철저하게 제압하고 증손자까지 4대에 걸쳐 60년 동안 이어지는 최씨 정권을 출범시켰지만, 최씨의 권력 세습도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경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이렇게 권력을 잡고 지키기 위해 죽고 죽이는 싸움이 그치질 않았으니, 이겨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대승은 사병 백수십 명으로 집을 지키게 하고 더러는 그들과 침식을 같이 했으며 호위 없이는 집 바깥에 나가지도 못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힘 빠지면 누군가의 먹이가 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누군들 불안하지 않았겠는가.
권력 빼앗았지만 왕실 무시 못 해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할 수는 있었지만, 권위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정당성 없는 권력자를 사람들이 인정하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이 갖지 못한 권위는 고려 왕실의 차지가 되었고, 무신들은 왕실을 무시하지 못했다. 쿠데타로 의종을 폐위한 뒤 그 동생 명종을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으며, 명종은 무신들의 권력 투쟁이 치열한 가운데 27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권력자를 인증하는 역할을 했다. 국왕이 인정해야만 무신정권의 권력이 행사될 수 있는 구조였다. 태조 왕건의 후손, 즉 용손(龍孫)으로서 왕실의 신성성도 부정하지 못했다. 이의방은 딸을 태자비로 들였다가 다른 무신들이 등 돌리는 바람에 권좌에서 쫓겨났고,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도 딸을 태자비로 만들려다가 역모로 몰렸다. 최충헌은 제 맘대로 2명의 국왕을 폐위하고 4명을 세웠지만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폭력으로 얻은 권력의 한계였다.

무신정권의 더 큰 문제는 무책임함에 있었다. 국왕이라면 아무리 폭군이어도 그 앞에서 “아니 되옵니다”를 외칠 수 있지만, 무신 권력자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한낱 개인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삶을 돌볼 의무가 이들에게는 없었으니, 무신정권 아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은 필연이었다. 고려의 무신 집권기가 어둡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폐쇄적인 문벌 사회가 붕괴되고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가 열렸다. 몽골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공도 있었다. 하지만 부정한 수단으로 수립된 정권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두고 공과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도 불법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행위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