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진단서, 재판 만능키일까?

2025-12-30

늘푸른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의 회장으로 새로 선출된 A씨는, 전임 회장이었던 B씨가 자신에게 통장과 인감도장을 넘겨주지 않는 것 때문에 몇 달 째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변호사의 상담을 받은 A씨는 B씨에게 동산인도단행가처분 신청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심문기일 직후, 차에 탑승하려던 B씨를 만난 A씨는 새로 선임된 부회장 C씨와 함께 B씨를 붙잡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말다툼을 하던 중 화가 나서 B씨의 정강이를 발로 한 차례 걷어차게 되었고, C씨도 B씨의 손목을 잡아 끌며 다그쳤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양 측의 변호사들이 이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들의 만류로 더 이상의 몸싸움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B씨는 법원의 판결이 나면 통장과 도장을 넘겨주겠다고 하고서는 차를 타고 법원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후 위 가처분 사건에서 법원이 A씨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B씨는 통장과 인감도장을 분실한 것 같다며 제때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A씨는 고민 끝에 B씨를 업무방해죄로 고소하였습니다.

그러자, B씨는 역으로 A씨를 상해죄로 고소하였는데, 사건이 있은 날로부터 무려 1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B씨는 수사기관에 사건 당일의 상황을 토대로 1년 2개월이나 지나서야 발급받은 상해진단서를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A씨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수사기관은 진단서가 있으니 일단 상해죄가 인정된다며 A씨를 기소하였습니다.

쟁점은 이것: 진단서의 내용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재판 과정에서 검찰(고소인 B씨)과 피고인 A씨는, 1년 2개월이 지나 발급된 상해진단서의 증명력(증거로서의 가치)을 두고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검찰과 B씨의 주장:

“사건 당일의 상황을 목격한 변호사들의 증언을 놓고 보면 A씨가 B씨를 걷어 찬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진료기록부에 의하면, B씨가 사건 당일 정형외과에서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표층열·심층열 치료 등)를 받은 기록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 1년 2개월 뒤에 작성되었더라도 당시 충격을 입은 상해 부위와 정도를 기재한 진단서는 공신력 있는 증거이니, 이들 기록에 목격자의 증언까지 더해 보면 상해죄가 성립합니다.”

A씨의 항변:

“무슨 소리입니까. 그 날의 일은 B씨가 어떤 상처도 입지 않을 정도였고 저에게 따로 상처를 입었으니 손해를 배상해달라는 연락도 없을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1년 2개월이나 지나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한 것으로 발급받은 상해진단서는 믿기 힘든 증거입니다. 만에 하나 B씨가 어떤 상처를 입은 사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상처는 굳이 치료할 필요가 없어서 자연적으로 치유되며 일상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니 상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법원의 판단은?

이에 대해, 1심과 2심은, 목격자들 및 진단서를 발급한 의사까지 증인으로 신문하며 꼼꼼히 심리했습니다. 하지만, 사건 당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사실이 있고, 진단서 내용이 공소사실과 일치하며, 목격자 진술이 피해자 주장을 뒷받침한다는 점을 근거로 A씨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대법원은 진단서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상해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며, 다음과 같은 점을 꼬집으며 사건을 파기환송하였습니다(대법원 2025. 12. 4. 선고 2025도11886 판결).

1. 의심스러운 진단서의 발급 경위: 사건 발생 1년 3개월 후에야 진단서를 발급받은 점, 그리고 A씨의 고소에 대응할 목적으로 고소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2. 주관적 통증에만 의존한 진단서의 발급: 진료기록부상의 치료들은 환자가 아프다고 호소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처방될 수 있는 경미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진료기록부에는 C씨의 행위로 인한 ‘손목의 타박상’도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B씨가 받은 물리치료가 A씨의 행위로 인한 것인지도 불분명했습니다. 한편, 1년 2개월이 지나 진단서를 발급한 의사는 진료 상황을 제대로 기억조차 못 하고 있었고, 그저 B씨의 진료기록부를 참조하여 상해진단서를 발급했던 것이라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3. 상해의 법적 정의: 굳이 치료할 필요 없이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경미한 상처는 법적으로 상해죄에서 말하는 ‘상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B씨는 사건 이후 병원에서 추가 치료를 받거나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박상홍 변호사 한 줄 정리!

상해진단서가 주관적인 통증 호소 등에 의존하여 의학적 가능성만으로 발급된 때에는, 발급 경위, 의사의 발급 근거는 물론이고, 진료를 받은 시점과 동기, 진료 경과 등을 면밀히 살펴 그 신빙성을 엄격하게 따져야 합니다.

박상홍 변호사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졸업 ▲대한변호사협회 형사법·가사법 전문 등록 변호사 ▲現 법무법인(유) 로고스 변호사·변리사 ▲ <2024 북한인권백서>, <금융피해 법률지원 매뉴얼>, <가정법원 너머의 이혼상속 상담일지> 등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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