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통령 보자 넙죽 큰절했다, 조선외교관 142년전 겪은 일

2025-10-19

모던 경성, 웨이터 50년

1883년 9월 18일 미국 뉴욕 5번가 호텔 귀빈실. 조선 관료들이 자못 긴장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습니다. 고종의 특명으로 미국을 방문한, 조선의 첫 방미 외교사절이었던 보빙사(報聘使) 이야기입니다. 관복을 갖춰 입은 이들은 당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가 등장하자 조선 왕실의 법도에 따라 큰절을 올리죠. 아래 본문에도 나오지만, 이 사진은 당시 현지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한국 최초의 웨이터, 이중일씨는 이들 보빙사 일행을 한국에서의 양식 문화의 출발점으로 꼽는군요.

이중일씨가 1971년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꾹꾹 눌러 쓴 이야기 보석함, 함께 열어보실까요. 사실 확인을 위해 다양한 관련 서적과 사료를 참고했습니다. 보완해 추가한 내용은 파란색으로 표시했고요. 참고문헌 목록은 기사 끝에 적시했습니다.

기사를 읽다 보시면 오디오 버튼이 나오는데요, 클릭하시면 옛 무성영화 변사 연기하듯, 본문을 읽어드립니다. 기사를 ‘듣는’ 즐거움도 누려보세요. ‘모던 경성 웨이터 50년’은 매주 월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모던 경성 웨이터 50년③고종 보빙사, 양식의 출발

1971년 3월 3일자 중앙일보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제일 먼저 양요리(양식)을 맛본 건 누구였을까? 아마도 민영익·유길준·윤치호 세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고종 20년인 1883년 민영익은 초대 주미대사로 유길준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미국 땅을 밟는다. 첫 주한미국공사 루시어스 H 푸트(Lucius H. Foote)에 대한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건너가게 된 것이다.

보빙사란, 답례로 보낸 외교사절이라는 의미다. 보빙(報聘)은 답례로 빙문(聘問·나라 간의 격식을 갖춘 사신 파견)한다는 옛말이다. 미국이 조선에 외교사절을 보냈으니, 조선도 답례로 파견한다는 뜻이 된다. 이들은 1883년 7월 16일 제물포(현 인천)항을 출발해 뱃길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대장정을 시작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만나 큰절하는 사진은 현지 언론 매체에도 크게 실렸을 정도로 화제였다. 이들은 미국을 횡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과 이집트 피라미드까지 돌아본다. 한반도 최초 세계 일주를 한 셈이다. 음식은 물론 현지 식으로 해결했어야 하니, 양식을 본격 맛본 1세대라 할 수 있다.

민영익·유길준 이들은 아마도 선상에서부터 양요리 맛을 보았을 수 있다. 적어도 미국 뉴욕에서 아서 대통령을 찾아가 고종의 국서를 봉정하면서도 디너 코스를 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유길준은 민영익이 알선해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 중 한 명으로 계속 미국에 남게 됐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세일럼(Salem)시에 있는 피바디(Peabody) 박물관의 당시 관장이었던 에드워드 모스 박사 집에 식객으로 들어갔다. 이후 영어 공부를 파고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길준은 이후 매사추세츠주 기숙학교인 덤머 아카데미(Dummer Academy, 추후 거버넌스 아카데미로 개칭)에 입학, 하버드대를 목표로 공부했으나 입학 4개월 만에 “조국의 정변으로 귀국하기 위해 중퇴한다”라는 기록이 학적에 남아 있다고 한다. 1884년 갑신정변 이야기다.

그는 보빙사 이전엔 일본에 유학한 첫 조선인 학생으로, 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중도 귀국한다. 당시에도 조국의 정변, 임오군란(1882)이 이유였다. 일본에서 개화론자가 된 그에게 보빙사 미국행은 일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는 전기가 켜지는 것을 보고 “마귀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다거나, 엘리베이터를 처음 탈 때는 “나를 가두는 것 아니냐”고 착각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일본 유학의 경험을 아쉬움으로 간직했던 그는 미국에서 유학의 결실을 맺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곡절 끝에 그는 다시 중퇴를 선택한다.

그럼에도 보빙사의 임무 중 미국에 남겠다고 자처한 것을 보면 그에겐 양식이 썩 잘 받았던 모양이다. 그는 이후 유럽을 거쳐 귀국한 뒤 『서유견문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민영익과 유길준보다 어쩌면 윤치호가 양식에선 한발 앞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윤치호는 푸트 공사를 고종에게 처음으로 소개했던 인물이다. 윤치호는 1882년 5월 3일 강화도에서 우리나라가 미국과 맺은 첫 조약인 한미수호통상조약에서 푸트의 말 상대 역할을 했고, 조인식이 끝난 뒤 그 자리에 차일(천막)을 치고 축하의 칵테일을 교환했기 때문이다.

윤치호와 유길준의 출발점은 같았다. 둘 다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일본에 건너간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 땅을 밟고 개화의 필요성에 눈을 떴다. 윤치호는 일본에 있으면서 주일 외교관들을 찾아가 영어도 공부했는데, 이때부터 둘의 길은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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