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동지 가르는 사회…시민 78%는 ‘공통의 세계’ 회복 원해

2025-10-17

중민이론 제창 40년…한상진 교수의 한국사회 진단

독일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강단에 선 30대 교수의 눈에 비친 한국 대학생들은 기대와 달랐다. 학교 대신 정부가 금서로 지정한 책과 동아리나 독서모임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고 졸업 뒤 공장으로 갔고 분신 같은 극단적 저항을 벌였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고민하던 그는 수강생들에게 독특한 과제를 냈다. 자신들이 겪은 가장 심각한 가치관의 갈등 체험을 써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1981년부터 1989년까지 2400여 개의 보고서를 모은 그는 “최루탄과 화염병의 공방 배후에 있던 학생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중산층+민중 ‘중민’을 변혁 주체로 봐

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이렇게 심층 분석한 86세대의 내면을 저작으로 냈는데 86세대에 대한 최초의 학술 연구로 평가받는다. 한 교수는 이들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급진적 세계관에 대해선 우려했다. 당시 그와 두세 시간씩 토론했던 86세대 대학생들은 이제 한국 사회의 주류 세력이 됐다. 한 교수는 이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24일 ‘중민(中民) 이론’ 40주년 학술대회를 앞둔 한 교수를 14일 서울 서초동 중민재단에서 만났다. 중민 이론은 ‘중산층’과 ‘민중’을 합쳐 만든 ‘중민’이란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설명하는 사회학 이론으로 한 교수가 1985년 제창했다.

학생으로 만났던 86세대의 특징은 뭔가.

“젊은 세대의 낭만이나 발랄함이 없었다. 회색빛이랄까. 항상 고민에 빠져 있었다. 수업엔 열심이지 않았고 대신 동아리나 지하 서클에 열정적이었다. 이를 통해 선배나 동료들과 결합했고 교수도 모르는 책을 읽으며 그들 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당시 대학은 두 개의 세계가 공존했다. 교수와 정규 수업을 통한 공식 활동, 그리고 동아리를 중심으로 하는 비공식적 지하 서클 활동이다. 후자가 훨씬 활발했고 양측 사이의 벽은 굉장히 컸다.”

학생들에게 낸 과제물이 독특했다.

“학생들과의 소통이 막힌 상태에서 이들의 내면을 응시해야 했다. 학생들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곧 외부에 내놓을 수 없었던 내밀한 삶의 과정과 거기서 느꼈던 갈등과 갈증, 또 지금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등을 매우 진솔하게 썼다. 나는 그것들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느꼈고, 이들이 무엇 때문에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가는 거리에서 서는지 이해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급진성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엔 이 나라가 근본적으로 잘못됐으니 급진적 혁명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들이 많았다. 학생뿐 아니라 진보적 지식인들도 그랬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물론 모순이 많고 관료적 권위주의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놀랄 만큼 경제 성장을 달성했고, 그 수혜를 입은 중산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보수층이 아니며 개혁을 지지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는 급진주의로 가면 중산층은 같이 가기 어렵다. 그리고, 학생들이 생각만큼 한국 사회가 양극 분해된 것도 아니다. 더 넓게 보고 깊이 고민하라’고 권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나.

“막상 논쟁을 하면 수긍을 했다. 그러면서도 많은 학생들이 ‘당신은 부르주아적인 생각에 감염되어 있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당시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론에 따라 해석하려는 풍조가 강했고, 민중과 노동자를 변혁의 주체로 내세웠다.”

한 교수가 사회 변혁을 이끌 주체로 중민을 제시할 당시 학계에선 민중을 앞세웠다. 한 교수의 중민이론과 서관모 충북대 교수의 민중론이 맞붙은 1988년 6월 4일 학술대회는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노동자도 중민에 넣어 민중론과 충돌했다.

“1985년 현대사회연구소의 연구실장을 맡아 여러 조사를 진행해보니 창원이나 마산 등 대규모 산단이나 대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미 고등학교든 전문대 이상이고, 소득 수준도 빈곤에 시달리는 무산 대중이 아니었다. 중화학 공업화 과정을 통해서 급속도로 성장해 중산층이 된 상태가 적지 않았다. 노동자들을 단일 개념으로 묶기 어려웠다. 그래서 학생들이나 학자들에게 ‘노동자들이 모두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런 무산 대중은 아니고, 혁명의 주체도 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변혁을 꿈꾸던 86세대가 주류가 됐지만, 모순은 더 커졌다. 양극화가 대표적이다.

“이들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너무 빨리 권력을 잡았다. 노무현 정부 때 탄핵을 계기로 정치권에 대거 들어갔는데, 공부도 안 했고 준비된 게 없으니 한 것이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젊은 피 수혈’ 명목으로 이들을 영입했다.

“당시 정당은 미숙한 단계였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민주당은 시민사회에서 세력을 끌어들여 ‘과감하게 바꾼다’는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욕망이 컸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학생운동 배경을 가진 ‘유명인’들이었다. 그러면서 감옥에 간 것이 민주화를 위한 희생의 증표로 인정받게 됐다. 이들은 전투성이 높고 단결력이 있고 동지애가 강했다. 단 너무 빨리 권력의 핵심에 진입해 부작용이 엄청나게 커지고 말았다.”

86 정치인들의 문제는 뭔가.

“민중에 대한 부채 의식이 많았으면 그들의 권리와 후생을 키우는 정책을 많이 만들고, 그 혜택을 누리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머리’가 없으니 운동권 정치, 즉 패권 싸움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개정해야 된다, 사학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게 민생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많은 갈등만 일으켰다. 민생에서 멀어지고,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한 교수는 다만 “86세대의 모든 것을 부정시하는 데도 동의하긴 어렵다”고 했다. 그는 “지금 정치권에 있는 이들은 86세대의 극히 일부”라며 “개혁지향적 성향을 가진 80년대 학번들이 사회 중추가 되면서 전보다 민주적이고 투명하고 개방적인 사회가 됐다는 점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40년 전 중민 이론은 지금도 유효한가.

“수정이 불가피하다. 사회를 보수와 진보의 틀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조사를 해보면 ‘진보’라는 이들이 꼭 개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공권력 강화에도 찬성하고 심지어 ‘규칙을 어기더라도 일이 빨리빨리 되면 좋다’고 답하는 경향이 다른 집단보다 높다. 그러니까 규칙을 비틀어서 대법원장도 불러내는 거다. 비틀어서라도 효과와 성과를 내면 좋다면 이건 독재적 권력이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런 생각을 선호하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과거 중민 이론을 만들 때는 진보는 약자를 수호하고 권위에 대항하고 근대를 지향했는데 그 패러다임이 무너졌다.”

규칙 비틀어 대법원장 소환은 독재적

그렇다면 이 시대의 중민은 누구인가.

“2020년 세계 33개 도시 시민들(1만756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정치가 ‘적과 동지의 투쟁에 충실해야’ ‘갈등의 배후에 있는 공통의 세계를 회복해야’ 중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투쟁을 선호하는 시민은 28%였고, 공통의 세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시민은 72%였다. 서울 시민은 78.2%로 훨씬 많았다. 조직화된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하니까 (정치적 갈등이) 표면에서 크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 대법원장을 불러 면박을 주고 대법관도 늘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적과 동지의 투쟁’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없을 거다. 하지만,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지 않으면 이 과정에 불만을 가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또, 우리가 지켜야 할 기본 원리나 상식, 예컨대 민주주의를 위해 삼권분립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건 다수 시민들이 동의할 가치다. 설령 다른 정치세력이라도 ‘갈등의 배후에 있는 공통의 세계를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는 이들을 중민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80년대 대학생들이 지금 20대를 ‘극우’라 규정한다.

“20·30대들을 ‘극우’라고 낙인 찍는 행위는 심각한 오류이고 정말 반성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극우가 뭔지도 정확히 규정도 안 된 상태다. 과거보다 우파적인 성향이 조금 강하다고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20대든 30대든 과거보다 많은 어려움에 직면한 가운데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여러 요인으로 자신들의 어려움과 견해를 표현할 정치적 통로를 갖고 있지 못한 상태다. 왜냐? 위에서 너무 많이 가져갔으니까. 그래서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이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만의 꿈과 논리도 있다. 이들은 철저히 개인화되어 있고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며 생존의 논리가 더 강하다. 이건 86세대들과는 또 다른 세계다.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며 낙인을 찍는다? 굉장히 위험하고 그 세대에 대한 모독이다.”

한 교수는 이 같은 고민과 성찰을 24일 서울대 국제협력본부에서 여는 중민이론 40주년 학술대회(‘세계적 양극화 시대, 성찰적 시민의 역할’)에서 발표한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