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없어요, 1인분 팔아요, 양파 채와 ‘사라다’ 없어요, 고기는 바싹 굽지 마세요
‘관성에 맞서’ 품종별 앞다릿살 골라서 주문할 수 있는 흑돼지 편집숍 탐방기

김진영씨는 지극히 개인적인 통계로, 경향신문 기자들이 좋아하는 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2주에 한 번 전국 시장을 방문해 베테랑 식품 MD답게 먹거리의 산지 정보부터 유통망, 조리법까지 소개했다. 또한 그의 칼럼은 여행기이자 한국 음식업의 고질적인 관행을 지적하는 고발이기도 했다. 온장고에서 생기 없는 공깃밥을 꺼내주거나 1인분 주문을 받지 않는 식당에 대한 성토가 기억난다.
‘24년 차 식품 MD’ 프로필로 시작해 5년간 이어진 ‘지극히 미(味)적인 시장’의 연재가 끝나고 1년 2개월 뒤, 그가 ‘흑돼지 편집숍’을 차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궁금해서라도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3월27일 서울 강서구에 있는 ‘칠흑’을 찾았다. 오후 6시가 채 안 됐는데 20석 규모의 작은 홀 안에서 세 테이블이 고기를 굽고 있었다. 평소 “백문이 불여일식”을 강조하던 김진영씨는 다짜고짜 불판에 불을 댕겼다. 기다란 접시에 얇게 썬 고기 세 덩어리가 나왔다. 이곳에서는 일명 ‘3돼장’이라 불리는 국내 인증 흑돼지 난축맛돈, 버크셔K, 우리흑돈을 품종별로 주문해 구워 먹을 수 있다. ‘흑돼지 하면 오겹살이지’하고 들어온 손님이라면 놀랄 수 있다. 여긴 오직 앞다릿살만 판다.
“돼지고기는 삼겹살, 목살이 대중적이잖아요. 110㎏짜리 돼지 한 마리를 잡으면 삼겹살은 16~20㎏밖에 안 나오니 원가 비중이 되게 높아요. 그래서 그 부위를 비싸게 먹는 거예요. 그 단단한 구조를 깨고 싶었던 거예요. 돼지고기 품종이 바뀌면 굳이 삼겹살을 고집할 이유가 없거든요.”

불판에 ‘난축맛돈’ 한 점을 올렸다. 제주 재래종과 랜드레이스종을 교배해 2014년 특허를 마친 흑돼지로 일반 돼지에 비해 근내지방량이 4배 이상 높아서 구이에 적합하다. 김진영씨는 벌써 익었나 싶은 고기를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이건 살짝 구워야 해요. 보통 돼지고기를 바짝 굽잖아요. 그거 다 옛날얘기예요. 인분을 밭에 뿌려서 회충 문제 있던 시절 얘기라고요.”
비계의 식감을 즐기지 않는 자의 주저함이 보였을까. 그는 11년 전에 버크셔 농장에서 생 비계 받아먹은 경험을 말했다. 식품 MD 체면에 마다할 수 없어 먹었는데 부드러운 치즈와 버터를 합쳐놓은 듯 맛있더라 했다. 그의 지령에 따라 자염을 뿌린 뒤 입에 넣었다. 살코기와 비계의 위화감이 없이 고소함이 잔잔히 번졌다.

“‘냉(동)삼(겹살)’ 바싹 구워 먹잖아요. 그럼 수분이 다 날아가 육즙이 없어요. 고기는 육즙을 즐기는 거잖아요. 품종마다 각각의 특징이 있어요. 낯선 방식이지만, 그걸 알고 먹어야 맛있어요.”
육종전문가 박화춘 박사가 개발한 ‘버크셔K’는 돼지 곰탕으로 소문난 옥동식의 주재료로 잘 알려져 있다. 근섬유가 가늘고 촘촘해 불판 위에서도 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김진영씨는 새우젓을 같이 올려 굽더니 고기에 척 얹어줬다. 씹는 맛이 즐거웠다.
재래 돼지와 두록의 장점을 결합한 ‘우리흑돈’은 지방이 탄탄하고 육즙이 풍부한 품종으로 고기 구울 때 빵 굽는 냄새가 난다는 평을 듣는다. 맛있는 잠봉 햄을 먹는 듯 조직감이 탄탄했다. 백돼지 맛에 익숙한 젊은 층은 난축맛돈을, 옛 맛을 기억하는 세대는 버크셔K를 선호한다고 했다.

마치 감별사라도 된 양 오로지 고기의 맛에 집중한 순간이었다. 테이블을 보니 찬이 단출하다. 자염 소금, 새우젓, 새싹채소 겉절이, 김치찌개와 김치가 전부다. “보통 순댓국집 가면 새우젓에 물이 흥건하잖아요. 베트남산 새우젓에 물과 조미료를 탄 거예요. 숙성하지 않아 아무 맛이 없거든요.”
그는 1년 6개월 숙성한 국내산 새우젓에 영양산 토종고추로 만든 수비초를 뿌려서 낸다고 했다. 점심에는 장조림용이나 잡육 취급을 받던 뒷사태로 돼지국밥을 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 낮에 국밥 40그릇이 완판돼 오후에 따로 끓였다는 국물 맛만 볼 수 있었다.

“손님들이 식당에서 놀라는 두 번째가 ‘잊고 있던 맛’이라는 거예요. 5년 동안 시장 취재를 다니면서 하고 싶었던 얘기가 이거예요. 산업화가 되면서 우린 효율성을 많이 따져요. 가치보다는 가격을 더 중시하다 보니까. (식당을 차린 건) 그 가치 하나하나를 세상에 소개하고 싶었던 거거든요.”
국밥 토렴의 원리, 품종별 고기 굽는 온도 등에 대한 취사병 출신 식품MD의 지식은 ‘조리는 과학’임을 상기시켰다. 요식업이야말로 문이과 통합의 영역. 현업에 뛰어드니, 외부자 시절과 다른 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이 이 식당을 주시하는 이유기도 하다.


“창업하면서 원가 분석을 해보니, 진짜 아닌데 싶은 게 너무 많았어요. 찌개 3만원짜리 시켰는데 공깃밥 가격은 별도? 이건 ‘양아치’거든요.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전 공깃밥은 그냥 드려요. 식당을 나설 때 ‘오늘 진짜 대우받았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의 식당에선 고기 1인분도 주문할 수 있으며, 온장고는 아예 없다. 바로 지은 밥을 내고 그날 남은 밥으로는 식혜를 만든다. “내가 (식당) 다니면서 싫었던 걸 여기서는 안 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가장 많이 들어간 건 후추를 제외한 모든 재료가 국내산이라는 것.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자연 재배 새싹채소, 끓여서 만든 자염 등에는 그동안 산지를 다니면서 쌓은 노하우와 인연이 녹아있다. 선택과 집중 덕분에 고기 1인분(170g)에 1만4000원이라는 가격 책정이 가능했다. “그래도 마진이 충분히 나와요. 산지 직거래를 하니까요. 중간에 퉁 치는 게 없으니 경쟁력 있는 거죠.”

상차림만큼이나 단출한 작은 주방에서 그는 새우젓을 구워서 먹고, 돼지 지방을 중화시킨다는 우엉을 넣어 육수를 끓이며, 곰탕 육수에 무조림을 하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산 김치를 쓰지 않는 건 자존심 차원이 아니라 “식재료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라고 했다. “요리의 70%는 재료가 다 한다”는 사부의 말을 인용한 그는 흑돼지에 이어 황소, 토종닭 버전도 구상 중이라고 예고했다.
삼겹살 없어요, 1인분씩 주문할 수 있어요, 고기는 바싹 익히지 않아도 돼요, 양파 채나 ‘사라다’ 없어요…. 30년 차 식품 MD의 첫 식당은 당분간 불판 위 고기를 노릇노릇 굽는 소비자의 ‘관성’뿐만 아니라 유례없는 탄핵 정국 불경기와도 싸워야 한다. 그는 씩 웃었다. “우리가 언제 쉬웠던 적이 없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