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학자”라는 지칭이 있다. 이 단어를 접할 때마다 ‘여성’과 ‘학자’의 개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두 표현 모두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여성학자’는 우리의 앎, 지식, 학문에 대한 인식을 뒤흔든다. 여전히 여성학자를 여성주의 연구자(feminist scholar)가 아니라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female)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상당수 기관이나 대학들이 여성주의자를 뽑아야 할 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단지 여성이라는 조건만 맞으면 선발하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에 여성학자는 학위가 있는 페미니스트를 긍정적으로 뜻하는 말인 듯하다. 여성학을 아예 학문으로 취급하지 않는 경우에 비하면, 그나마 고마운 일일까. 내가 가장 그리고 자주 곤란할 때는 사람들이 내 전공을 물을 때다. 나는 전공이 없다. 특정 학과에 대한 소속감도 없다. 대신 나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다학제적인 주제에 관심이 있다. 자주국방, 아내폭력, 식민지 남성성, 탈식민주의, 미군 ‘위안부’… 공부는 관점에 의해 달라지는 영역일 뿐 소재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이 여성학자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특정 분야와 성별을 불문하고 여성주의 시각의 연구자를 통칭하는 표현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전공이 뭐냐는 질문에 “여성학인데요”라고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학문도 있어요? 그러면 남성학도 있나요?” “남성학은 없는데 여성학이라니, 여성 상위 시대네” 같은 반응부터, 갑작스러운 경계의 눈빛까지….
이처럼 여성학(women’s/gender/feminist studies)은 너무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곤경은 여성학이 국문학이나 수학처럼 하나의 분과 학문이 아니라 사상, 관점,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인문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예술 분야든 그 어떤 전공도 내부에 한 가지 관점만 있는 경우는 없다. 여성주의는 마르크스주의, 탈식민주의처럼 인간과 세계를 파악하는 시각의 하나로서 분과 학문이 아니다. 내가 아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있어도 ‘마르크스주의 학과’는 없다. 탈식민주의 문학은 있어도 학과 이름이 ‘탈식민주의’인 경우는 없다.
여성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모든 학문은 중립적이지 않다. 계급, 인종, 젠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중 젠더는 인간의 조건이고 가장 비가시화된 영역이다. 지식은 하나의 담론으로서 그 자체로 사회적인 것이고, 사회적인 것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여성학은 기존의 근대 지식이 서구 남성의 시선에서 구성되었다는 점을 지각하고, 이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주의적 입장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여성들 간의 차이에 대한 숙고야말로 여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여성주의의 대표적 구호지만, 바로 그 순간 “어떤 여성인가”라는 질문이 동반된다.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의 경험은 같지 않다. 중산층 여성과 가난한 여성의 삶은 말할 것도 없다. 여성들 사이에는 계급, 민족, 지역, 성 정체성, 장애, 나이 등 수많은 차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 이론은 개인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여성이라도 사정은 각기 다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여성주의는 맥락적 지식이며 젠더뿐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를테면 중년 여성의 삶에서 가장 큰 모순은 젠더에서 나이 듦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한국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여성주의자로서 위치성을 갖지만, 미국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민족(ethnicity)’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앞서 말한 대로 여성학은 학제가 아니라 관점이기 때문에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지식에 대한 도전으로서 여성주의 철학, 여성주의 법학, 여성주의 신학 등은 있을 수 있지만 ‘여성학과’는 모순이다. 여성주의가 발달한 미국의 경우 다양한 분과 학문에서 페미니스트들이 활약하고 있다. <과학과 젠더>의 저자인 이블린 폭스 켈러는 양자물리학자이다. 그녀의 “제가 공부한 것은 여성에 관한 것도 남성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과학일 뿐입니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사이보그 선언문>으로 탈근대 철학의 지평을 연 도나 해러웨이는 영장류 생물학자이다.
이준석 의원의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과 유승민 전 의원의 여가부에 대한 입장이 다른 점은, 여성학과가 따로 있어야 하는가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전자는 구조적인 성차별이 없다는 억지일 뿐이고, 후자는 모든 정부 부처가 여성주의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 여가부가 따로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유승민 전 의원의 논리가 맞지만, 이는 판타지다. 그런 세상이 언제 올 것인가. 그러려면 적어도 과장급부터 젠더 전문가가 전 부처에 포진해 있어야 하고, 모든 학과에 여성주의 관점을 지닌 교원이 최소 30% 이상 있어야 한다.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젠더 전문가 양성 기관으로서 독립적인 여성학과가 절실히 필요하다. 여성으로서 삶을 ‘살아내고’, 수십년간 여성주의를 공부한 여성주의자도 가부장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항상 긴장 상태에서 자기 시각을 훈련해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마르크스주의자도 마찬가지다. 모든 공부가 그렇지만 여성주의 관점은 평생에 걸쳐 형성되는 가치이다. 새로운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은 24시간 깨어 있는 상태를 요구한다.
현재 서울 지역에는 일반대학원에 여성학 전공 과정이 있는 대학이 한 곳, 협동 과정을 운영하는 곳이 한 곳 있다. ‘지방’의 사정은 너무나 열악하다. 대구·경북독립언론인 ‘뉴스민’(www.newsmin.co.kr)의 김보현 기자는 이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바로 “계명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 폐지되나…공대위 꾸려져 반발”이라는 기사다.
‘지역’ 여성학과의 중요성
“35년 역사를 가진 계명대학교 여성학과가 폐지되고 사회학과에 흡수될 예정이다. 대학 본부가 충원율 저조를 이유로 여성학과가 소속되어 있는 정책대학원 자체를 폐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여성학과는) 일반대학원 사회학과 내 세부 전공으로 남게 됐다. 여성학과는 지난해부터 ‘일반대학원에 별도 여성학과를 개설해달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지역 여성단체와 학생·연구자 중심으로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한강 이남 유일한 여성학과를 사회학과에 흡수하는 건 시대에 역행하는 조치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2월부터 3월 초까지 동문을 제외한 936명이 연서명에 참여했다.”
위 기사에서 학교 측이 말하는 “여성학과 충원율 저조”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사회학과보다 여성학과에 더 지원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성학과 지원자를 사회학과로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대구대 사회학과가 폐과되었고, 동국대 사회학과도 폐과설이 나오고 있다. 덕성여대는 독문과와 불문과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학문의 다양성 말살, 비민주적 절차 등 수많은 문제가 있으나, 여성학과 폐지는 또 다른 문제다. 여성학과가 다른 학과로 흡수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는, 여성학은 아무나 가르칠 수 있다는 여성과 여성학에 대한 비하가 전제되어 있다.
계명대 여성학과 존폐는 지역 발전과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송경인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계명대 여성학과는 지역 여성운동에 큰 역할을 해왔다. 실제로 대구는 전국에서도 여성운동이 탄탄한 지역”이라면서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공부나 성장이 필요할 때 여성학과에 입학해 현장과 연결된 연구를 하며 활동의 동력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현대사회에서 학문의 분화와 융합, 다양성 확보는 돌이킬 수 없는 추세이다. 국문학과에서 문화 연구가 활발하고, 서구 영문학은 탈식민과 퀴어 연구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특수교육’을 넘는 장애학, 국제정치학을 재구성하는 평화학 등 새로운 분야가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왜 여성학은 분화되지는 못할망정 기존 학문에 흡수되거나 대학에서 아예 사라지는가. 특히 계명대 여성학과는 30년 이상 ‘지역을 넘어’ 한국 사회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폐과론이 대두될까. 이 문제는 학내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지역과 학문 생태계를 동시에 파괴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