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무슨 글” 父 호통… 92세 초등검시 합격 ‘부산 애순이’의 꿈

2025-05-13

“글을 배우고 싶어서 간 야간학교도 아버지가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오는 바람에 글을 못 배웠다.” “글을 보면 나는 꽃을 본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는 것 같다.”

지난달 부산시교육청이 시행한 초등 검정고시 최고령 합격자인 박경자(92ㆍ해운대구 반송동)씨가 쓴 시 ‘글이 너무 좋다’에 담긴 구절이다. 초등 부문 기준 부산에선 물론 전국 최고령 합격자다. 박씨는 13일 통화에서 “말로는 다 못할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다. 내 삶을 글로 옮길 수 있게 된 것도, 좋은 선생님 덕에 시험에 합격한 것도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13살 소녀 때 새긴 ‘못 배운 한’

박씨는 1933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남 흑산도, 어머니는 경남 김해 출신이어서 어린 시절 이들 지역을 오가며 살았다고 한다. 그는 “김해에 살던 때 일본 학교엔 조금 다닌 적이 있지만, 한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글이 너무 좋다’에 쓴 야간학교 이야기는 박씨가 실제 겪었던 일이다. 그는 “글이 배우고 싶어 13살 때 야간학교를 찾아갔는데, 그때 아버지가 몽둥이를 들고 (야간학교에) 나를 데리러 왔었다”며 “아버지는 여자가 글을 배우거나 밖으로 나돌면 안 된다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글 배우기를 포기했는데, 이게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7남매 건사하려 16가지 일했다”

어른이 돼 결혼을 하고 나서는 글공부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박씨는 “7남매를 낳고, 먹여 살려야 했다. 조선소 배 수리, 고기잡이, 옷 짓는 일 등 잠도 제대로 못 자고 16가지 일(직업)을 닥치는 대로 했다”고 회상했다.

박씨의 남편은 40년 전 암으로 숨졌고, 슬하 7남매 중 두 아들도 2010년, 2016년 무렵 떠나 보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게 박씨 설명이다. 그러던 중 박씨는 5년 전 동네를 지나다 우연히 ‘파랑새 복지관에서 한글을 가르쳐준다’는 안내를 봤다.

그는 “교회를 다니면서 어깨너머로 배워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그 덕에 안내를 알아봤다”며 “퇴행성 관절염 때문에 다리가 많이 불편하지만, 복지관은 집이 가까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글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고 했다.

복지관에서 글을 배우는 동안엔 쑤시는 듯한 퇴행성 관절염의 통증도, 자식을 보낸 허전함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음껏 읽고 쓸 수 있게 된 박씨는 시화전에 작품을 내 몇차례 입선도 했다. ‘글이 너무 좋다’처럼 그가 쓴 시엔 모두 인생 이야기가 담겼다.

“어머님은 할 수 있어요” 용기 준 선생님 말

검정고시에 응시하게 된 계기에 대해 박씨는 “2, 3년쯤 전 복지관 이영지 선생님이 검시를 준비해보라고 권했다. ‘어머님이라면 할 수 있다’는 선생님 말씀이 정말 큰 응원이 됐다. 국어뿐 아니라 사회, 수학, 과학 같은 과목을 공부해야 했는데 선생님이 친절히 가르쳐주셨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지난해 처음 치른 시험에선 낙방했다. 초등 검정고시는 필수 4과목(국어ㆍ수학ㆍ사회ㆍ과학)과 선택 2과목(도덕ㆍ체육ㆍ음악ㆍ미술ㆍ실과ㆍ영어 중 택2)에 응시해 평균 60점을 넘겨야 합격한다. 그는 “작년엔 시험이 쉽다고 생각했는데도 떨어졌다. 올해는 시험이 어렵다고 느껴져 걱정했는데 오히려 붙었다”며 “가장 어려웠던 과목은 국어다. 정해진 시간 안에 글을 다 읽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게 어렵게 느껴진다”고 했다.

박씨에겐 중등검시에 도전하고픈 마음도 크다. 하지만 배울 곳이 마땅찮다고 한다. “중등 공부를 가르쳐주는 곳이 있지만 버스를 두세번 갈아타야 하고 거리도 멀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그 먼 길을 다니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는 박씨 목소리엔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다만 그는 “글을 배우면서 시를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은 계속해서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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