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장비 ‘이중 심의’…예산낭비·연구비 횡령 막는다

2025-12-08

#. 정부출연연구기관 중 한 곳인 A 기관은 핵융합 에너지 연구를 위해 ‘고온 나노인덴터 모듈’ 장비 구축을 추진했지만 지난 11월 ‘국가연구장비 도입심의’에서 구축 보류 의견을 받았다. 1억 9000만 원 규모의 해당 장비는 핵융합처럼 극한 환경에서 견딜 수 있는 재료를 개발할 때 필요한 초정밀 장비로, 핵융합로 소재 특성을 분석하는 데 핵심적인 기술로 여겨진다. 그러나 심의위원회는 제출된 자료만으로 장비의 필요성과 활용성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장비 활용도 입증을 위한 사용 건수·분석 소요시간 등 정량 근거가 부족해 가격 적정성을 검토하기 어렵다는 지적이었다. 또한 기존에 운용 중인 다른 장비와 연계해 사용할 경우 성능 저하가 발생할 우려도 나왔다. 이에 심의위원회는 장비 사양과 호환성 전반을 다시 검토해 재신청할 것을 A 기관에 요청했다.

최근 이처럼 국내 연구 현장에서 국가연구장비 도입심의로 장비 구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막는 사례가 늘고 있다. 국가연구시설장비진흥센터(NFEC)에 따르면 정부가 연구장비 구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2007년 도입한 ‘국가 연구장비 도입심의’ 제도를 통해 지금까지 절감한 예산은 약 9000억 원에 이른다. NFEC 집계에 따르면 도입심의위원회는 예산 편성 단계에서 실시하는 본심의를 통해 4632억 원, 예산 집행 단계의 상시심의 등을 통해 4291억 원의 불필요한 지출을 줄였다. 지금까지 심의 대상이 된 장비 구축 요청만 8950건으로 매해 수십~수백억 원의 연구 장비 관련 예산을 조정해 왔다.

과거 국내 연구 현장에서는 연구장비와 관련한 예산이 불필요하게 낭비되고 각종 비리에 활용되는 문제가 비일비재했다. 규모가 큰 연구기관에서 학과·연구실 단위로 동일 장비를 여러 대 중복 구축하거나, 고가 장비 도입 명목으로 확보한 예산을 실제보다 저렴한 장비 구매에 사용하고 남은 예산을 다른 용도로 쓰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거액의 연구비를 기관장이나 관련 연구자가 빼돌리거나, 설치 후 1년이 지났지만 활용률이 0%에 가까운 고가 장비가 감사에서 적발된 일도 적지 않았다. 또한 일부 연구기관에서는 수십억 원대에 이르는 첨단 장비가 연구자 교육 부재·설치 지연·보안 미비 등의 이유로 장기간 방치되는 문제도 반복됐다.

정부는 이러한 비효율을 해결하기 위해 2007년 이후 도입심의 기준을 점진적으로 강화해 왔다. 사업목적 부합성, 기술·성능 적정성, 장비 중복 구축 여부, 활용계획의 현실성, 보안·운영계획의 타당성 등을 엄격히 심사하는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또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예산 배분·조정 과정에서 1억 원 이상의 연구장비에 대해 민간 전문가 중심의 심의를 의무화 했고, 과학기술표준분류를 기반으로 8개 분야에서 총 243명의 전문가 풀을 구성했다. 전문가들은 연 20회 열리는 심의를 통해 장비 구축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등 심의 제도는 단순히 장비 구매를 승인하거나 제한하는 차원을 넘어, 연구환경 전반의 적정성을 검증하는 기능으로 확대됐다.

다만 심의 강화가 첨단 분야의 연구 속도를 늦추는 부작용도 일부 나타났다. 특히 최근 인공지능(AI) 연구 확대로 GPU 기반 고성능 서버 수요가 급증하면서 장비 공급 속도가 연구 경쟁력을 좌우하게 되자, 심의 절차가 혁신·도전형 연구의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이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혁신·도전형 연구개발(R&D) 사업에 필요한 연구장비를 보다 빠르게 도입할 수 있도록 하는 패스트트랙 방안을 마련했다. 혁신·도전형 R&D의 경우 35일 정도 걸리는 국가장비 심의 기간을 20~21일 가량으로 단축하고, 도입 타당성을 인정받은 장비의 경우 예외를 인정해 조달에도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했다. 정부 관계자는 “GPU의 경우 클러스터 구축을 위해 여러 장을 한 번에 사는 등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며 “혁신·도전형 연구의 경우 단순히 심의 기간만 단축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조달 과정을 줄일 수 있도록 패스트트랙을 마련해 첨단 산업 추진에 차질이 없도록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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