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색 왕관에 술이 찰랑거리는 황금 드레스, 부채처럼 길게 뻗은 속눈썹, 이마와 볼에 붙인 큐빅이 반짝인다. 무지갯빛 레이스 숄은 이탈리아 가면무도회를 떠올리게 했다. 생활한복 차림의 참가자, 드라큘라와 조커, 여전사를 연상케 하는 모습까지. 각양각색의 드랙 아티스트들이 10월의 가을 서울 도심을 물들였다.
개천절인 3일 오후 4시,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서 ‘서울드랙퍼레이드’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이태원역까지 약 1시간 30분간 행진했다. 휴일을 맞아 해방촌을 찾은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버스 승객들도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구경했다. 박수와 환호로 화답하기도 했다.
드랙(drag)은 의상·화장·행위 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문화 예술 장르다. 드랙 아티스트 ‘허리케인 김치’와 ‘알리 베라’는 2018년부터 서울드랙퍼레이드를 개최했다. 행사는 단순한 축제를 넘어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문화·인권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들에게 드랙은 ‘규칙 없는 예술’이다. 알리 베라는 “(드랙을) 남장이나 여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드랙은 성별에 갇히지 않고 정체성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예술 수단”이라고 말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드랙 아티스트로 무대에 서는 순간, 그는 “해방감을 느낀다”고 했다. 허리케인 김치는 “드랙에 정답은 없다. 어떤 사람은 재미로, 어떤 사람은 자기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해, 또 어떤 사람은 그걸 마음껏 드러내기 위해 한다”고 말했다.
올해 행사의 콘셉트는 ‘블랙 앤 골드’다. 허리케인 김치는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주제곡 ‘Golden’의 가사 ‘I’m done hidin’, now I’m shinin’ like I’m born to be’(더는 숨지 않겠어, 이제는 내가 태어난 그대로 빛나고 있어)가 드랙과 성소수자의 메시지를 잘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드랙은 클럽이나 유흥 문화 속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낮에도, 일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드랙은 단순한 ‘변장’이 아니다. 자신을 표현하고, 공동체를 확인하며, 다름을 드러내는 해방의 언어다. 자신을 레즈비언이라 밝힌 앤디(31)는 “평소 내향적이라 진한 화장이나 코스튬을 못 입는데, 다 같이 하니 용기가 났다. 드랙을 한 내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충남 아산시에서 온 미국인 맥스(41)는 “드랙은 나에게 ‘공동체’”라며 “사회가 정해놓은 경계선을 밀어내며 서로를 지지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인 폴(27)은 “드랙은 예술이자 정치”라고 정의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성소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려 한다”며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행위가 된다”고 말했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유학생 렉시(34)는 “한국은 늘 앞으로 나아가고 변화하는 나라라 좋아한다”며 “성소수자뿐 아니라 장애인, 이주민 등 모든 소수자, 즉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