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대형 참사는 유독 보수정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태원 참사뿐 아니라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도 지금 정권에서 일어났다. 이상한 일이다. 보수정권은 안정과 행복을 제일로 추구하는데 왜 그 반대되는 일들이 일어날까. 대통령 탄핵 건도 그렇고 비상계엄도 마찬가지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스스로 자기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정권에 반란을 일으키는 이상한 행위를 한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꿈꾼 것인가. 그 누구도 반성하지 않는 이상한 집단은 도대체 무엇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인류가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유전자에 심어놓았다는 자기희생적인 헌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인류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보수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타인을 다 죽이려는 반란은 보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참사가 이어지는 소위 보수정권이 지키려는 가치,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이 지켜가야 할 가치라면 우리는 선거를 통해 무엇을 뽑은 것일까. 자신의 목숨과 경제적인 활동의 결과물을 맡길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보지 않고 덜컥 줘버렸기 때문에 백주대로에서 선 채로 죽어가도 괜찮은 걸까.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지켜온 민주주의 제도를 총과 군인을 동원해 깨부수려 하는 것도 괜찮은 걸까.
세월호의 사건은 여전히 인명을 구하지 못한 충격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다. 세월호는 10주기가 되었다. 안산 단원고 3학년이었을 때이므로 10년이 지났으니 같은 또래의 사람들은 20대 후반이 되었다. 2년 전 일어났던 이태원 참사에서도 젊은이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도심지 한가운데서 걷다가 죽었다.
<참사는 골목에서 머물지 않는다> 북토크가 있었던 날, 동네 책방 입구부터 실내까지 보라색 풍선이 가득 달리고 천장에는 별이 달렸다. 이날 참여했던 희생자의 부모님들은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국가의 폭력 아래 서게 된 것이다. 희생자 가족들이 이 일을 겪으면서 처음으로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후회와 눈물,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함께 울었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계엄령 선포로 알게 된 것이 있다. 보수라고 일컫는 집단은 국가와 시민에 대한 책임 의식이 없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보수의 상징이었던 의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 위하여 했던 말들은 모두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 의미를 실천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국민도 진정한 의미도 상관없다는 걸 알았다.
이번 국민의 불행인 비상계엄은 그런 의미에서 일반인들에게 매우 시사적인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권력을 대신 수행해 주기 바랐던 국회의원들이 국민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사적 욕심에만 몰입에 있다는 것이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제도로 대응하고 있는 과정도 의미심장하다. 윤석열 집단이 행했던 폭력과 안하무인의 행동들은 낱낱이 드러나고 성역 없이 공개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국민이 그 실체를 알게 되는 과정에 있다. 우리가 잘못 뽑은 권력 집단이니 어쩔 수 없다가 아니고 우리를 속이고 뽑힌 권력 집단이 어떤 집단인지를 알게 된 것이 이번 사건의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
비상계엄을 벌써 몇 번째 경험을 겪은 사람으로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순간 얼룩무늬 복장과 철모, 총을 들고 탱크와 함께 행군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 세월호와 이태원의 세대들이 응원봉을 들었다. 응원봉은 경쾌하고 발랄하고 새로웠다. 무릎이 시리고 추위에 떨던 탄핵 집회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도 될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참사는 골목에서 머물지 않는다> 북토크가 있었던 날 동네 책방에 매달린 보라색 풍선처럼 마음이 아팠지만 아름다웠다. 함께 울지 말고 함께 즐기며 이겨나가야 한다.
조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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