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동포에게 8·15는 고국과 단절된 날…‘틈새’의 존재에게 위로를”

2025-08-17

[플랫한 티타임]은 각자의 위치에서 여성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나눈 이야기의 기록입니다. 높낮이 없이, 위계 없이, 평평한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진짜 목소리를 기록합니다.

“1945년 8월 15일이 우리에게는 해방을 맞이한 날이었지만 사할린 동포들에게는 반대로 고국과 완전히 단절되는 날이었다. 그날이 다시 이산가족을 만드는 날이었다는 것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징용된 조선인 가족들의 연대기 <슬픔의 틈새>(사계절출판)를 펴낸 이금이 작가(63)는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과 만나 저술 계기를 이렇게 밝혔다. 이 작가는 <너도 하늘말나리야>, <유진과 유진>, <밤티마을> 시리즈 등을 펴낸 아동·청소년 문학 작가다. 그는 2017년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사계절출판)부터 <알로하, 나의 엄마들>(창비 2020)로 이어지는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 디아스포라 소설을 써왔다. <슬픔의 틈새>는 이 작품들의 마무리 격이다.

이 작가가 사할린 한인의 삶에 천착한 데에는 2018년 사할린 여행이 큰 영향을 줬다. 당시 그는 사할린에서 이제는 할머니가 된 동포들을 만났다. 이 작가는 “사할린에서 태어난 분들이 대부분이었음에도 부모님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한국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계셨다”며 “그분들이 앞다퉈서 말하고 싶어하셨다. 자신들의 한을 풀어놓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사할린 이야기를 써야겠다 마음먹었다”고 돌아봤다.

<슬픔의 틈새>는 1943년부터 2025년까지의 시간을 그린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이 점령한 사할린 남부를 화태(樺太)라고 불렀다. 일본식 명칭 가라후토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이다. 11살 소녀 주단옥이 화태 탄광으로 징용 간 아버지를 찾아 엄마, 형제들과 뱃길에 오르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단옥이 사할린에서 일하고, 결혼하고, 자녀와 손주를 보며 삶을 일구는 과정이 징용, 광복, 한국전쟁, 소련 점령, 수교 등과 같은 굵직한 역사적 소용돌이와 맞물린다. 온갖 풍파를 겪고 한세월을 ‘살아낸’ 단옥이 눈을 감으며 소설이 끝난다.

이 작가는 이런 구성을 택한 이유에 대해 “사할린 한인의 삶을 제대로 알려면 어느 한 구간을 자르기보다는 통시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 인물의 생애가 그들의 과거, 살았던 과정과 현재, 미래를 보여줄 수 있다고 봤다는 얘기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현재성이 있는, 현재도 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태어난 곳과 오래 산 곳 중 어디가 고향인가’는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슬픔의 틈새> 속 등장인물들엔 이 질문이 더 무겁게 내려앉는다. 이들은 ‘나라 잃은’ 국민이자 어느 장소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디아스포라(흩뿌려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래전 떠나온(혹은 가본 적 없는) 조선을 그리워하는 한편, 추운 땅 사할린을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재외동포라고 하면 한국으로의 귀환을 무조건 희망하리라고 흔히 예상하는 것보다는 한층 복잡하다.

이 작가는 이러한 복잡성이 ‘인간다운 감정’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과 귀환을 망설이는 마음은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1세대는 그리움이 분명하겠지만 2세대, 3세대로 갈수록 지금 사는 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을 막연히 그리워하면서도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식물 하나를 화분에서 옮겨 심어도 거기서 살아내려고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적응해서 살지 않나. 지금 사는 곳을 떠나겠다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더 이상하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을 막은 가장 큰 장벽은 따로 있었다. 1945년 8월15일 해방 이후 이들은 곧바로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지 못했다. 일본은 조선인 귀환을 책임지지 않았고, 당시 한국은 재외동포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사할린 남부를 되찾은 소련은 한인 노동력을 써먹으려고 했다. 귀환선에 타지 못해 투신하거나 정신질환을 얻은 이들도 있었다.

귀환은 곧 이산가족이 됨을 뜻했다. 한국의 재외동포 관련 법은 2018년까지만 해도 ‘광복 이전에 출생한 사람과 배우자, 장애가 있는 자녀’만 받아들였다. 이주 2~3세대, 1세대의 자녀와 손주는 배제됐기 때문에 이 요건에 해당하는 자라 하더라도 가족을 사할린에 남겨 두고 혼자 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모든 자녀와 그 배우자를 포함한 전 가족’이 동반 귀국할 수 있게 된 건 2025년이다.

이 긴 시간 동안 사할린 한인들이 느꼈을 기대-배신감-기대-좌절의 과정은 “때 없이 일상을 뒤흔드는 고향이라는 게, 조국이라는 게 차라리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인 1세대들은 조국을 그리워하면서 원망했고, 미워하면서 절절히 사랑했다” 등의 구절에 담겼다. 노인이 돼 한국을 방문한 단옥이 비행기 3시간짜리 거리를 “50년이나 걸려서 왔다”는 대목도 있다.

이 작가는 인터뷰 자료집 등을 보며 이와 같은 감정을 추출해 냈다. 그는 “처음부터 의지하고 기댈 존재가 없었다면 그냥 살았을 텐데,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구석이 있어 계속 배신당하고 상처받는다면 없느니만 못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수십 년에 걸쳐 기대와 실망을 했다면 ‘차라리 아예 없었다면’ 싶을 것 같았다. 딱 그분들의 삶을 표현해주는 문장”이라고 덧붙였다.

<슬픔의 틈새>는 광복 80주년인 15일 출간됐다. 이 작가는 “(일반적으로) 광복절을 휴일 정도로 생각하지만 해외의 동포들에겐 광복절이 다른 의미였다는 점을 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틈새’는 사할린 동포뿐만 아니라 모든 경계의 존재들에게까지 확장된다. 그는 “과거 우리 동포가 해외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 속 이주민까지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모두가 힘든 시기, 틈새를 비집고 올라가면 행복도 주어지리란 희망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이 작가는 어른과 아이의 ‘틈새’에 해당하는 청소년에게도 위로를 전했다. 청소년은 그가 상정한 <슬픔의 틈새>의 주 독자층이기도 하다. 이 작가는 “청소년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이방인, 소수자, 경계인이다. 공부를 이유로 많은 것들에서 소외당하고 그때 누려야 할 것들을 유예당한다”며 “틈새를 당당하고 굳건하게 이겨나갔던 단옥처럼 청소년 여러분들도 존재 자체로 이미 훌륭하게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 책을 읽으며 인간에 대한 믿음을 느끼길 바란다”고 했다.

이 작가는 1984년 새벗문학상으로 등단했다. 교과서에 <너도 하늘말나리야> 등 여러 작품이 수록됐다. 지난해에는 ‘아동문학계 노벨상’으로 꼽히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문학상에 한국인 최초로 글 작가 부문 최종 후보가 됐다. 올해도 한국 후보로 뽑혔고, 국내외 도서전에서 활발히 대중과 만나는 중이다(수상자 선정은 내년). 이 작가는 “글을 쓰면서 이미 받을 수 있는 기쁨을 다 누렸기 때문에 최종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우리 아동 문학이 세계로 나가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상을) 받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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