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이야기

2025-05-21

언제나 그는 커피 한 잔만을 들고 수업을 했다. 실수로라도 종이 한장 가져오는 법이 없었다. 새로 부임한 유명 수학자라는 말에 호기심으로 신청했던 강의였다.

한 모금 커피를 마시고, 칠판 구석에 키워드를 두세 개 적어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차츰 칠판을 채워가다 질문이 나오면 다시 커피를 마신다. 진심을 담아 연기하는 배우처럼, 어느 한 마디에도 설익은 이해는 낄 틈이 없었다. 처음에 적었던 키워드들이 모두 등장하고 나면 그날의 90분 강의는 마무리되었다. 학생이던 내게는 마냥 신기한 경험이었다. 강의의 소문을 들은 다른 대학 학생들은 부러워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비밀을 조금 알게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매시간의 목표를 오직 하나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등장하는 키워드들과 90분간의 설명은 모두 수업 끝에 등장하는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되었다. 복잡한 요소가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단 하나의 정리를 증명하기 위한 부품들이었다. 외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단계와 단계는 필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첫째’, ‘둘째’가 아니라, ‘그러니까’와 ‘그러니까’의 연속이었다. 초반부의 대사 하나하나가 복선이 되어 결말로 이어지는 영화 같기도 했다.

수학자들은 흔히 수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주관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공통분모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응축의 미학 아닐까 싶다. 수백, 수천 페이지의 논증이 단 한 줄의 정리로 향하는 것. 논리라는, 필연이라는 실이 흩날리는 책장을 매어 하나의 강렬한 드라마를 완성하는 것. 가끔씩 백일몽에 빠져본다. 우리의 삶이 책이라면 거기엔 경험과 선택이 책장으로 흩날린다. 평생 하고 싶고, 다시 태어나도 하고 싶을, 단 하나의 이야기는 무얼까. 이를 엮어낼 신념과 열정이라는 실이 내게 충분히 남았을까.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