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 햄릿이 된 다운증후군 배우의 실존적 질문…연극 <햄릿>

2025-05-22

“저는 서른 살이고,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햄릿’ 역할을 하는 배우이고, 연극을 하지 않을 때는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로 일하죠. 축구팀 단장이면서 인플루언서이고, 다운증후군협회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유엔에서 장애인권리를 발표하도록 초청도 받았습니다.”

이 다중의 역할을 수행하는 하이메 크루스는 서울 충정로 모두예술극장에서 23~25일 공연되는 페루 극단 ‘테아트로 라 플라사’의 연극 <햄릿>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1일 모두예술극장에서 만난 크루스는 7년 전 연출가 첼라 데 페라리와의 만남을 이렇게 떠올렸다.

“저는 극장 안내원이었어요. 연기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배우 하이메 크루스라고 자기 소개를 하곤 했죠. 어느날 첼라가 제 소개를 듣더니 저를 더 알고 싶다더군요. 햄릿을 연기해보겠냐고 제안을 받았죠. 그렇게 연출가들과 배우들이 모이고, 연기를 배우게 됐어요. <아나니아스>라는 넷플릭스 영화도 찍었죠.”

프로그램북에 소개된 인터뷰에서 페라리는 크루스와의 대화가 “그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저의 극심한 무지와 내면의 편견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다”고 말했다. ‘신경전형인’(전형적인 발달 과정을 거친 사람. 비장애인을 뜻함)으로 살아온 자신을 자각하고, ‘신경다양성’(자폐특성, 지적스펙트럼 등 뇌신경의 차이로 발생하는 다름을 생물적 다양성으로 인식하는 관점)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이들 교류의 결과인 <햄릿>은 크루스를 비롯한 8명의 다운증후군 배우가 연기한다. 연극에서 배우들은 ‘햄릿’이면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그 유명한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고전 속 질문을 장애인의 실존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지적 장애인이 아이를 낳아도 되느냐’는 질문으로 대표되는 일상 속 편견과 차별들을 장애 당사자가 무대에서 정면으로 문제제기한다.

“햄릿과 우리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 연극이에요. 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기회를 쟁취할 수 있는지 얘기합니다. 장애가 절대 장애물이 될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마냥 천사가 아니며,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녀도 가질 수 있다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고요.”

이날 대체로 막힘없이 답변을 이어가던 크루스는 자신의 ‘햄릿적 고뇌’를 묻는 질문에는 한숨을 쉬며 한참 생각했다. “예전의 저는 장애를 인정하기 싫어했어요. 신경전형인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죠. 하지만 이제는 장애가 있던 없던 어울릴 수 있고, 불편함도 느끼지 않습니다.”

1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쳐 2019년 10월 페루 리마에서 초연됐다. 이번에 함께 방한한 협력 연출가 조나탄 올리베로스는 “모두가 다같이 참여한 ‘공동체’ 연극”이라면서 “장애를 가진 배우들이 존재론적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도록 요구하고, 녹여내려고 했다”고 창작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첫 공연 때 일주일에 하루만 쉬고 매일 올렸는데 비장애인 배우랑 같은 강도를 요구했다”고 덧붙였다.

연극에선 준비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장면으로 녹여낸다. 크루스는 자신의 특기가 ‘기억하기’인데도 대사가 너무 길고 어려워서 힘들었다고 한다. 때로는 무대에서 머릿속이 하얘지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동료들이 서로 도와주는 문제 해결 능력까지도 연습 과정에 포함됐다고 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장애 당사자들이 배우로 등장하는 작품들이 관심을 받았다. 주목되는 지점은 장애 예술가들이 ‘장애가 있는데도 잘했어’가 아닌 미학적으로도 의미있는 작품을 구현하고 있다는 있다는 점이다. <햄릿> 역시 장애 예술이면서 기존의 관념을 깨는 현대극이다.

“신경다양인들도 이러한 연극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신경전형인들에게 알리는 거 자체가 의미있어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때 ‘와우’ 환호성을 지르고, 멋진 연기에 놀라는게 좋습니다.”

2022년 시작된 월드 투어는 미국 뉴욕 링컨센터 등 세계 곳곳의 유명 공연장을 거쳤다. 이번 서울이 41번째 도시다. 올리베로스는 “<햄릿>이 끝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 연극의 목표가 달성됐다는 생각을 한다”며 “연극을 통해 장애 자체를 잊고, 장애가 능력이나 기회가 될 수 있고, 타인을 이해하는 창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은 다르다. 우리는 다양성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메시지가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호주, 캐나다로 이동해 3년여의 투어를 마무리하게 된다. 하이메 크루스에게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하고 싶은 일을 묻자 “한국의 스타벅스에 가볼 것”이라고 했다. 한국 관객에게 남기는 말도 잊지 않았다. “굉장한 연극 <햄릿>을 꼭 관람하러 와주세요. 공연 막바지에 관객들과 소통하는 ‘서프라이즈’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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