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탄핵 태풍 속 한국의 외교 정책 ‘반일 돌변’ 가능성에 촉각

2024-12-17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인 4일 이후 일본 언론에는 한국 관련 뉴스가 폭증했다. 일본 4대 일간지(요미우리·아사히·닛케이·마이니치 신문)는 열흘 동안 신문사별로 3회씩이나 사설에서 한국 정치 상황을 다뤘다. 주요 방송국은 너도나도 한국에 특별 취재팀을 파견했고, 한반도 전문가들도 언론에 총출동했다.

한국이 이렇게 집중적 관심을 받은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계엄 선포가 일본인들에게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현상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유명한 한반도통인 니시노 준야(西野純也) 게이오대학 교수는 지난 4일 TV에 출연해 “권위주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 민주화 이후 이미 40여년이 지난 한국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논평했다.

한·일 관계개선 노력한 윤 대통령

좋게 평가하던 일본, 계엄에 놀라

일본 정부 신중히 반응하면서도

국교 60주년 정상 방문 차질 주시

민주당의 외교안보관에 우려 커

일본 중시 외교 변화할지 속앓이

요즘 일본인의 눈에 한국은 국민소득으로나 민주주의의 성숙도로나 일본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선진국이다. 더욱이 일본인 사이에 윤석열 대통령은 10년 넘게 경색 상태이던 한·일 관계를 개선한, 신뢰할 수 있는 ‘국가 지도자(statesman)’라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계엄을 선포한 지도자가 윤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일본인들은 경악한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지금 사상적 내전 상태”

일본 현지에서는 이번 계엄과 탄핵 사태의 원인으로 극심한 내정 갈등을 지목한다. 주한대사를 역임한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대사는 “한국에서는 여당이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야당도 여당이 추진하는 정책은 무조건 반대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전문가인 아사바 유키(淺羽祐樹) 도시샤 대학 교수는 “(지금 한국은) 사상적 내전 중이며 가정도 직장도 분단 상태”라고 꼬집었다. 옆에 있던 패널들이 “원래 정치는 조금씩 타협하는 것 아닌가”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계엄과 탄핵 사태를 보도하는 일본 언론의 평가는 엄중했다. 4대 일간지는 헌정 질서를 수호하겠다고 군대를 동원한 것은 용납될 수 없는 ‘폭거’라는 취지로 윤 대통령을 비판했다. 게다가 향후 한·일 관계를 크게 우려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해 조기 대선이 있을 경우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승리 가능성을 점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대표가 일본을 “군사적 적성 국가”라고 비판하고, 일본 측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처리해 방류하자 “제2의 태평양 전쟁”이라며 강경 발언했던 것을 일본인들은 기억한다.

언론의 민감한 반응과 달리 일본 정부는 신중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인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는 계엄 선포 다음 날 기자들에게 “타국의 내정에 대해 이래저래 말씀드릴 입장이 아니다”라면서 “특단의, 중대한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회의 탄핵안 가결 이후인 지난 16일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일·한 관계의 중요성은 변함없다. 한국 측과 계속해 긴밀히 의사소통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신중한 반응은 미국과도 온도 차이가 상당하다.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계엄 선포에 대해 “심대한 오판”이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 내정이 어느 때보다 유동적인 상황에서 일본 정부의 발언이 자칫 한국에서 민감한 반일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보니 극도로 신중한 자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야 6당의 1차 탄핵안 내용에 민감 반응

당초 일본 정부는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자 오사카 엑스포(EXPO)를 계기로 양자 정상 방문을 성사시키려는 구상이었다. 이를 통해 한·일 관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방향으로 양국 협의를 진행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갑자기 요동치며 불안정해지면서 이런 구상이 수포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 현지에서는 향후 한국 정부의 대일 외교 기조가 다시 ‘반일’로 돌아설지 모른다는 일본 언론의 우려는 ‘기우’가 아닐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본 측은 지난 4일 6개 야당이 공동발의한 1차 탄핵안에서 거론한 탄핵 사유를 우려의 눈으로 보고 있다. 야 6당은 윤석열 정부의 가치외교 추구, 북한·중국·러시아 적대시,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 정책과 일본에 경도된 인물 기용으로 인해 한국이 동북아시아에서 고립되고 전쟁 위기가 초래됐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일본의 정책 당국자가 들으면 경악할 내용이다.

이런 내용이 탄핵 사유라면 향후 야당이 집권했을 경우 한국 정부가 어떤 외교를 펼칠지 역으로 유추할 수 있다. 가치외교를 내려놓을 것이며, 북한·중국·러시아에 접근할 것이고, 일본과는 거리를 두며 지일파들을 정부에서 몰아내겠다는 것 아닌가. 굳건한 한·미 동맹과 우호적인 한·일 관계를 축으로 한·미·일 공조가 원활한데, 한국이 고립돼 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한·일 관계 개선과 한·미·일 공조 때문에 전쟁 위기라는 주장은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왜곡이다.

야당도 1차 탄핵안의 이런 문구가 무리수라고 뒤늦게 인식했는지 2차 탄핵안에서 전부 삭제했다. 하지만 일본에선 1차 탄핵안에 들어간 외교 분야 문구가 야당의 외교안보관을 생생하게 드러낸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동맹과 우방에 외교의 일관성 보여줘야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했던 ‘동북아 균형자 외교론’은 실패가 누차 검증된 정책이다. 2015년 9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이 주최한 전승절 기념식에 러시아 등 독재국가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바람에 미국과 일본 측의 분노를 자아냈을 때 한 번 검증됐다. 문재인 정부 시절 북·미 중재 외교가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실패하면서 재차 검증됐다.

지금 한반도 정세는 외교 실패를 거듭한 정책을 또 검증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 미·중, 미·러 갈등이 격화하고 있고, 북·러는 사실상 군사동맹을 맺었다. 미국에선 동맹과 다자외교보다 일방적 국익 추구를 우선시하는 트럼프 2기가 출범한다.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한·일이 중심을 잡고 한·미·일 공조를 매개로 동북아 안정을 적극 추구해야 할 상황이다.

균형외교는 그럴싸하고 듣기 좋을지 모르지만, 국제사회의 갈등 고조 국면에서 균형자를 자처하다간 자칫 모두에게 버림받는 ‘박쥐 외교’로 전락할 수 있다. 절제된 반응 이면에서 일본 지도자들이 속앓이하고 있는 부분은 사실 한국의 대일 외교 노선 전환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내정 불안정이 고조되는 지금 국면에서 동맹과 우방의 우려를 불식해줘야 한다. 외교적 일관성을 제고하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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