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 속에서도 멈출 수 없는 것들

2025-01-20

“원래는 지난해 12월 대통령을 모시고 성대한 출범식을 열 예정이었지요. 그러다 대행인 국무총리로 주관이 넘어가더니, 이젠 기획재정부 장관으로까지 넘어갔습니다. 하기로 한 것이니 조만간 출범식을 열겠지만, 다부처 파견으로 구성되는 지원단이 구성되고, 본래 취지대로 위원회가 굴러가려면 사실상 다음 정부 출범 이후라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위원회의 설립 근거가 대통령령이라, 법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이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는 지금 첨단 바이오 전쟁이 한창인데, 답답할 뿐입니다.”

탄핵 정국 속에 길을 잃은 국가바이오위원회의 한 인사가 전해준 얘기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할 ‘3대 게임체인저 기술’(AI-반도체·바이오·양자) 중 하나로 선정된 K바이오 기술과 산업의 신세가 가련하다.

탄핵 정국에 위원회·인사 멈춰

윤 정부, ‘잃어버린 시간’ 되나

임기제 기관장 정실인사 끝내고

미래 위해 과기계는 돌아가야

R&D 예산 삭감에 탄핵 정국까지

눈을 뜨니 또다시 겨울이다. 탄핵 정국 속에 온 나라가 얼어붙었지만, 과학기술계에는 한파에 한파가 더해졌다. 1년여 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폭풍 같은 충격을 받았던 과기계가, 이번엔 탄핵 정국이라는 ‘북극 한파’를 맞았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은 위원회들은 연이은 탄핵으로 마비 상태, 새 기관장을 맞아야 하는 정부 출연연구소들은 천수답 농부처럼 하늘만 쳐다보는 신세가 됐다. 이대로라면 조기 폐막이 거의 확실한 윤석열 정부는 과학기술인에게 ‘잃어버린 시간’으로 불릴 지경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과학기술 수석, 첫 우주항공청(KASA)을 만든 정부이지만, 여소야대의 수렁 끝에 12·3 계엄으로 촉발된 탄핵 정국이 ‘과학입국’ 정부를 집어삼키고 있다.

위원회는 윤석열 정부 과학기술 분야의 트레이드 마크다. 정부가 내세운 게임체인저 기술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컨트롤타워가 돼 해당 분야를 추진하고 부처 간 업무도 조율하겠다는 거다. 그렇게 잉태된 게 대통령 직속 국가우주위원회와 국가인공지능위원회·국가바이오위원회 등이다. 하지만 위원회 정부는 연이은 탄핵 정국을 맞아 거꾸로 독이 됐다.

바이오 기술과 산업에 관한 국가 전략을 총괄하는 국가바이오위원회는 계엄과 탄핵 정국을 정면으로 맞았다. 지난해 12월 공식 출범할 예정이었지만, 연이은 탄핵 정국 속에 어려움에 빠졌다. 형식적으론 대행이 그 역할을 하면 되지만, 현실은 달랐다. 새로운 대체 지휘부가 된 기획재정부의 업무가 산더미처럼 많아진 탓이다. 대행의 대행이 제대로 대통령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는 소리도 나온다. 바이오위원회는 설 연휴 전에 그간 미뤄왔던 출범식을 연다고 하지만 이후 일정에 대해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상황이다.

지난해 9월 상대적으로 일찍 출범한 국가인공지능위원회도 홍역을 앓고 있다. 지난달 2일 첫 워크숍을 연데 이어 AI기본법도 통과돼 법정기구가 됐지만, 국회의 예산 전액 삭감으로 인해 예비비 형태로 지원단을 꾸려가고 있다. 국가인공지능위원회 홈페이지(aikorea.go.kr)는 아직도 ‘오픈 중’이다. 지원단장은 대통령실 AI·디지털 비서관이 맡기로 되어있지만, 탄핵 이후 과기정통부 파견 국장급이 사실상 직무대행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난해 11월 대통령실에서 발표한 ‘윤석열 정부 후반기 과학기술 분야 5대 개혁방향’은 실행조차 어렵게 됐다. 유상임 과기정통부 장관이 “기술사업화에 직을 걸겠다”고 선언한 뒤 부처 간 조율을 위해 만든 부서와 정책 역시 산업통상자원부 등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관장 인사 멈추는 게 위법”

과학기술계 인사도 탄핵 정국 속에 얼어붙었다. 정부 출연 연구원이 주 대상이다. 그나마, 그간 차일피일 미뤄졌던 항공우주연구원장과 천문연구원장 선임이 지난 16일과 17일 각각 결정된 게 전부다. 유 장관이 지난달 23일 기자 간담회에서 “지금이 탄핵 정국이기는 하지만 과학기술과 ICT 분야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절대 멈춰 설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한 효과였을까. 하지만 항우연과 천문연 두 기관은 계엄 선포가 있던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이미 기관장 후보 3배수를 추리고, 인사 검증이 거의 끝난 곳이었다. 유 장관이 뚝심으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그 이상은 쉽지 않다는 게 과기계의 전망이다. 실제로 두 기관 외 출연연 기관장 인사는 감감무소식이다. 현재 기관장 임기가 만료된 과기계 연구기관은 기초과학연구원·한국생명공학연구원·한국지질자원연구원·한의학연구원·철도기술연구원·세계김치연구소 등이다. 이들 기관 중 한의학연구원과 생명연구원은 각각 3개월 전, 1개월 전 3배수까지 후보가 추려졌지만, 이후 인사 검증이 계속 늦어지고 있다. 과기계의 한 인사는 “그간 대통령실에서 과기계 기관장 인사에 대해 내정을 해온 게 현실인지라, 머잖아 출범하게 될 차기 정부의 뜻과 무관하게 기관장을 뽑았을 경우 뒷감당이 어렵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탄핵 한파 속 얼어붙은 과학기술계 인사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탄핵된다고 기관장, 대학 총장 인사가 멈춘다면 그건 엄연히 또 다른 위법을 저지르는 것이다. 장·차관과 같은 정무직 자리 외에는 법령과 규정에 정해진 대로 인사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히나 미래를 책임지는 과기계 기관장 인사는 최고의 국가대표를 뽑는 거라 생각해야 한다. 이참에 임기제 기관장에 대한 정실 인사는 끝을 내야 한다.”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감옥에 들어가는 판에 과학기술계만 별일 없을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일을 준비하는 곳은 그래서는 안 된다. 농부는 굶어 죽을지언정 봄에 뿌릴 씨앗만은 먹지 않는다고 했다. 과학기술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담긴 씨앗이다. 정치·사회 혼란이 극단으로 치닫는 속에서도 과학기술은 바로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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