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의 의례는 단순한 가족 행사를 넘어 집안의 응집력을 확인하고, 그 질서 안으로 편입하는 의미를 가지는 자리다. 계약과 이사회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국·유럽 등 서구 기업과 달리 한국의 대기업은 경영에서 혈연과 혼맥을 중시하는 경향이 짙다. 다시 말해 ▶가문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혈연과 혼맥을 통해 경영권을 물려주며 ▶주요 행사 때마다 스킨십을 통해 결속을 다진다.
그중에서도 혼사는 가문 내부는 물론 상대 가문과 연대하고, 다른 재계 인사들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그들만의 본드 결속력’을 확인하는 대표적인 이벤트다. 어린 자녀의 돌, 제사, 장례 등에서도 집안 내 유대감 강화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계 8위 회장님의 반전 일화
지난 4월 하순 서울 강남에 있는 한 특급 호텔. 연회장 한 곳이 VIP들로 북적거렸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김영명 예올 이사장 부부와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 홍정욱 전 국회의원 등이 가족·부부 단위로 입장했다. 시간 단위로 스케줄을 관리할 만큼 일정이 빠듯하다는 오너경영인들이 총출동한 것.
이날 행사장엔 17일 재계 8위 HD현대그룹의 회장으로 선임된 정기선 회장도 함께 했다. 그는 정몽준 명예이사장의 장남이다. 널리 알려진대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손자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는 사촌 간이다.
정 회장은 그동안 현대중공업지주 대표이사 사장(2021년 10월), HD현대 대표이사 부회장(2023년 11월), HD현대 수석부회장(2024년 11월) 등을 거쳐 이날 HD현대 회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HD현대그룹은 1988년 정몽준 이사장이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전문경영인 중심으로 경영을 이어왔다. 이번에 정 회장이 HD현대 회장에 오르면서 37년 만에 오너경영 체제로 전환하게 됐다.
다시, 호텔 연회장, 이곳에선 고(故)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큰딸 영애씨가 미국인 사위를 맞는 한국식 예식 행사가 열렸다. 폐백 분위기는 여느 잔칫집처럼 흥겨웠다. 깔끔한 정장과 고운 한복을 입은 참석자들은 연신 스마트폰 플래시를 터뜨리며 신혼부부의 앞날을 축복했다.

자산 88조원대로 재계 8위이자, 대미 관세협상과 맞물려 ‘마스가(MASGA·다시 미국 조선업을 위대하게)’의 주역으로 주목받는 정 회장은 이곳에선 뜻밖의 모습이 포착됐다. 그는 왜 테이블에서 ‘뽀로로’ 영상을 틀어놓고 있었을까.
(계속)
정 회장은 1982년생으로, 2020년 7월 결혼했다. 결혼 나이가 상대적으로 늦은 편으로, 연세대 경제학과와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MBA)을 거쳐 2009년 HD현대중공업에 입사한 이후였다.
12살 연하인 아내 정현선씨와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을까.
정기선 회장의 일화, 아래 링크에서 더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