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테크놀로지

2024-10-06

한국에서 온 신입생 한 명이 내 토론토 대학 연구실을 찾아왔다. 꾸깃꾸깃한 종이 메모, 그리고 자그마한 쇼핑백 하나를 불쑥 들이대며 한국에서 아버지 친구분이 자기를 통해 보냈다고 전했다. 새우깡 한 봉지랑 소주 한 병이 들어있었다. 그때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멍하게 서 있었다. 그날 저녁이 돼서야 갑자기 20여년 전에 미국 동부로 유학 와서 몇 번 만났던 수학과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하하하. 그렇구나. 용석이!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뇌 기능은 플라톤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와 이론가들이 고심하며 이해하려 했던 소재다. 근래에는 신경심리학 및 인지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기억에 관한 신기하고 흥미로운 사실들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다.

스마트폰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21세기에 들어 인간 기억력의 구조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전화번호 하나 외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이 어떻게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의 20만 단어를 외워서 읊었을까 상상하지 못한다. 지금도 기억력 대회 선수들이 흔히 사용하는 ‘장소 연상 기억법’(기억하고자 하는 정보들을 가상의 장소에 배치하고 그 장소의 이미지와 결합해 기억하는 방법)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웅변가들이 활용했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는 시와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적 창의력의 여신들, 즉 뮤즈들의 어머니다. 므네모시네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들의 진실을 관할하는 통괄적인 존재로 신과의 교류를 상징한다. 기억과 망각은 인간존재의 양면이다. 지금 우리는 기억이라는 행위 자체를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의해 빼앗기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기억해야만 할 것을 같이 기억하는 데 민족의 동질성이 있는 것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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