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박정희는 열등감 가득 찬 국민에 자신감 심어준 지도자”

2024-11-13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7주년, 강영욱 ‘박정희아카데미’ 원장에 듣다

대담 진행=윤덕우 주필 겸 편집국장

오늘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큰 인물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생 107주년이다. 107년 전, 가난과 혼란 속에서 태어난 그는 이후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끈 리더가 되었다. 박정희아카데미를 이끄는 강영욱 원장과 함께 그의 삶과 리더십, 시대적 역할과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에게 남긴 유산과 그가 던지는 메시지를 찾아본다.

윤덕우 편집국장(이하 윤) : 오늘은 박정희 대통령의 탄생일이다. 박 대통령 탄생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에 얽힌 일화를 소개해달라.

강영욱 박정희아카데미 원장(이하 강) : 박정희 대통령은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백남의 여사가 박정희를 임신했을 당시 생활은 어려웠고, 이미 45세로 늦은 나이에 15세인 딸과 동시에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를 지우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간장 한 사발 마시기, 밀기울(밀을 빻아 체로 쳐서 남은 찌꺼기)을 끓여서 마시기, 섬돌에서 뛰어내리기, 장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쳐 보기,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기 등을 하였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그녀는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깔려도 보았다가 허리를 못 쓸 정도 다쳤는데 뱃속 아기는 여전히 뛰놀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뒷동산에 올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는 등 여러 차례 낙태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싸서 아궁이에 던져 버려야겠다.”고 작심하고는 낙태하는 일을 멈췄다. 이처럼 태어날 수 없는 생명이 될 뻔한 아기가 세상의 빛을 본 것은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 오전 11시경이었다. 당시 노산(老産)이 부끄러워 최대한 조용히 나으려 했지만 아이 울음소리가 우렁차서 동네에 사과하러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 : 박 대통령의 가계에 대해 알려달라.

강 : 박정희 대통령은 고령 박씨(高靈朴氏)다. 고령 박씨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둘째 아들 고양대군 박언성(朴彦成)을 시조로 하는 신라왕족의 후예다. 조선 영조 때 문신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잘못된 제도와 탐관오리를 단죄하는 데 앞장섰던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1691~1756)의 후손이기도 하다.

아버지 박성빈씨는 칠곡 약목 땅의 부농인 조부 박영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집안 홀대를 받아 유산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는 소문도 있다. 부패한 시절인 구한말, 벼슬을 한다고 논밭을 팔아 가산을 탕진하거나 동학군으로 동학운동 실패 후 술을 좋아하고 가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기골이 장대했고, 무과에 합격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박 선달”이라고 불렸는데 선달은 문무과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얻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어머니 백남의씨는 산음 현감을 지낸 백효연의 15대손, 이천부사와 경상좌수사를 지낸 백수일의 6대손이다. 낙안군수와 내금위장을 지낸 백동신의 현손이기도 하다.

윤 : 현재 기획특집으로 연재 중인 ‘2024 박정희’는 어떤 배경과 목표로 시작하게 되었나?

강 : 2018년 어느 봄날, 현 김문수 고용노동부장관이 서울의 박정희 기념재단 관계자들과 대화 중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인 대구경북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과 통치개념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듣고 저에게 해 보자는 제의를 했다. 그때 저는 (사)미래 본의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박정희란 이름을 내세운다는 것과 서슬 퍼런 문재인 정권 아래서 박정희아카데미를 운영한다는 자체가 힘든 생각이 들어 처음에는 사양했다. 거듭되는 요청에 마지못해 2018년 3월에 (사)미래 본 병설 박정희아카데미를 설립하고 120여명의 신입생으로 박정희아카데미 제 1기를 열었다. 현재 7기까지 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2018년부터 7회에 걸쳐 박정희아카데미를 개최하면서 조국근대화와 산업화를 주도했던 박정희 대통령을 조명했지만 시간 및 장소적 제한으로 대중화되지 못했다. 특히 청년층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점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는 길을 찾던 중 대구신문에 ‘2024 박정희’를 연재하게 됐다. 이를 위해 (사) 미래 본 병설 박정희아카데미 산하에 박정희연구회를 조직했다. 그 연구회 회원은 강영욱, 박노광, 사공정규, 손복수, 임종화, 최병익, 최상길, 방숙희 등이다. 현재 이들이 연재물을 집필하고 있다. 현재까지 6개월 동안 11회 게재 중에 있고 앞으로 2년 동안 60회 정도 계획하고 있다. 독자들의 관심이 많은 것으로 듣고 있다. 연재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미화하거나 우상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과를 진솔하게 알리고자 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청소년기와 청년으로서 성장하면서 가졌던 고뇌와 이상,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겪었던 갈등, 그리고 남북분단 하에서 부국강병을 통해 조국 근대화를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의 꿈과 이상, 그리고 좌절을 객관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청년층을 비롯한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윤 :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는 기틀을 마련한 부국강병의 아버지라는 평가가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를 이끌어 가는 리더십이 필요한데 그 형성과정을 어떻게 보고 있나.

강 : 참 귀하고 의미 있는 질문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청소년 교육 문제의 해답을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부모님들이 한번 되새겨 볼만한 대목들이다. 초등학교 시기는 정신의학적으로 본격적인 자아 성장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다. 특히 이 시기는 자존감을 갖느냐 열등감을 갖느냐 하는 주요 시기이다. 초등학교 학령기 아동의 자존감 형성에는 학교성적 및 학업능력, 또래 관계, 학교 선생님의 인정 등이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부분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보통학교 시절 우수한 학교성적 및 학업능력은 자존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소년 정희에게 급장은 작은 키와 가난이 열등감이었던 그를 유능감과 자신감을 가지는 소년으로 바꾸어 놓았다. 소년 정희는 자존감 형성은 물론 자신의 유능감을 더욱 증명하려는 근면성과 우월성 추구를 향한 노력을 배가했다. 소년 정희는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늦게 입학한 나이 많은 동급생 학우들을 학습지도했다. 체육 시간에 선생님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 기다리도록 하고, 학급 운영을 선도적으로 척척 해내는 등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러한 것들이 훗날 지도자로 가기 위한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마련해 준 공부방으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소년 정희로 하여금 아동으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과묵하고, 냉철하였으며, 사색적 성격을 형성하는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오원철 중화학공업기획단장(박정희 대통령 제2경제수석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을 ‘사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또한 어렸을 때 아이에게 절대적인 인간관계인 부모나 선생님이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소년 정희에게 어머니 백남의와 보통학교 선생님들의 긍정적 기대와 관심은 정희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으리라 믿고 있다. 동료 급우들에게 키 작고 나이어린 박정희 급장은 때로는 차가운 표정을 짓기도 했는데, 권위를 유지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자세였을지도 모른다. 소년 정희는 이렇게 완력에서는 당할 수 없는 상대를 때로는 친절한 도움으로, 때로는 차가운 카리스마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소년 정희는 벌써부터 사물을 선과 악이란 기준으로 보지 않고, 전략적 발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식민 트라우마’, ‘분단 트라우마’, ‘6.25전쟁 트라우마’, ‘절대 빈곤’ 속에서 “우리는 할 수 없다”라는 열등감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로 가득 차 있던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해보자”라는 자신감(自信感)과 실천력을 심어준 지도자였다. 개인의 열등감을 넘어 민족적 열등감을 치유해준 ‘박정희 정신(朴正熙精神)’을 한 번 더 되새기게 된다. 그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우리가 있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본다. 이는 작은 키와 가난이라는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승화시킨 소년 정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박정희는 교사이기도 했지만, 군인이 되고 싶어했다. 어린 시절 병정놀이를 즐겨했고, 실제 구미에서 일제 강점기 군인들이 훈련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무서움의 대상이던 경찰서장이 군인장교에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도 큰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사물을 힘과 승패의 관점에서 보는 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문도 주목해 봐야 한다. 이 두 사람의 위인전 만큼 박정희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없을 것이다. 일본을 막아낸 이순신장군 동상도 호국의지로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하여 광화문에 세워졌다. 아동기에 읽는 위인전의 영향이 평생을 간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백지상태 어린 마음에 최초로 발자국을 만드는 위인들의 삶은 신선한 충격, 흥분, 상상력을 제공하고 인생 설계의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소년 정희가 영웅들의 전기에 심취했다는 것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회과학의 종합 학문인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이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관심으로 발전하게 됐다. 구미보통학교의 소년 정희는 말이 없고 생각은 많은 아이였다. 훗날 대통령 박정희는 깊은 사색 끝에 원대한 전략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는 “생각한다”는 것의 힘을 안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기억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분위기와 구미 보통학교 급장 시절 소년 정희의 분위기는 묘하게 겹치고 있고, 급장 소년 정희의 통솔방식이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술로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윤 : 박정희아카데미를 운영하시면서 보람이나 후회 같은 것은 없는지.

강 : 질문을 받으니 순간 감회가 새롭게 지난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간다. 우선 부족한 것이 많은 제가 박정희라는 민족 영웅의 정신교육에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한다는 자체가 최고의 영광이고 보람이다. 그리고 아카데미가 설립되어 6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뒤에서 또는 옆에서 묵묵히 도와주고 있는 분들을 얻게 되었다는 것도 보람의 큰 부분이다. 더욱이 500여명의 졸업생이 뜻을 같이해 박정희 정신을 알리고 있다는 것과 그 중에서도 젊은 친구들 안민기, 윤희, 이태경을 비롯한 30여명이 이 아카데미에 참여해 함께하고 있다는 것도 또다른 보람 중 하나다. 후회요? 나 자신 능력과 인성 부족으로 주위사람에게 마음 상처를 주었을 때 좀 더 나은 분이 이 사업을 해야 박정희 정신을 올바르게 교육하는 데라는 부족감을 느낄 때다. 또한 편히 살지, 늙었으면 가만있지 날 뛰느냐고 빈정대는 오랜 친구의 말들, 지난 정부 아래서의 이런 저런 압박 이런 것들이 엉켜 올 때 후회보다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남들은 이곳 대구경북이 보수의 텃밭이니 더 쉽게 아카데미를 운영할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고가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다른 지역이 더 쉽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이곳은 사고의 한쪽 매몰이 심해 의견을 나누는 것조차도 금기시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실은 더 힘든 것 같다. 결론적으로 후회하지 않고 보람만 느끼며 아카데미를 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저보다 더 나은 후배에게 물려주어 영원한 박정희아카데미가 되도록 밑알이 되겠다.

윤 : 최근 박정희 대통령 관련 기념사업이 늘어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 :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신다는 것이 매우 반가운 일이고 환영할 일이다. 다만 이런 일들이 일회성이라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지난 8년간 이 일을 해 본 경험에 비추어 많은 기념사업들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을 자주 봐왔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업들을 추진하는 분들이 사욕을 가지고 수행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참여했다 떨어졌다하는 경우가 많다. 문재인 정권 아래서는 별로 관심 갖지 않다가 윤석열정부가 들어서니 우후죽순으로 많은 기념사업들이 일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두렵다. 그런 것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이 좋지 않게 될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특히 젊은 층에게 영향을 줄까 더 그렇다. 이것은 그동안 순수하게 기념사업을 해 오던 분들에게 악영향을 미칠까도 우려된다. 일반적인 일에도 그러하지만 이런 기념사업은 사적인 욕심이 동반되지 않을 때 아름답고 순수해 보이며 귀하게 본받아 지게 된다.

윤 : 마지막으로 ‘2024 박정희’를 쓰시면서 고증과 자료 수집은 어떻게 하며, 연재에 어려움은 없는가?

강 : 어~~ 사업 비밀인데…(웃음). 우선 우리 집필진의 노고에 감사를 먼저 드린다. 7,000자의 특집 기사를 쓴다는게 그것도 2주에 한번씩.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우선 주제에 따라 현재 가지고 있는 자료와 시중에 나온 책자, 기사, 블로그 등 모든 매체에서 자료 수집을 하고 그것에 대한 진위 여부를 교차 체크를 한다. 특히 관련 사진을 수집하기 위해 국가기록실 등 찾을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 하고 있다. 마침 평생 동안 이 일에 매달려 왔던 분도 집필진으로 있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연재물이 완성하기 까지는 3단계를 거친다. 일단 집필하는 분이 초고를 내면 그것을 교정 및 내용을 추가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팩트 검증을 한 다음 관련 사진 수집 및 수록한다. 한 연재물이 나오기까지는 대략 한 달은 소요된다. 주제별 초고하시는 분과 그 다음 단계를 하시는 분들의 팀워크가 현재는 잘 이루어지고 있다. 저는 항상 독촉한다. 연재물의 초고가 2편은 수중에 있어야 한다고. 무서운 시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2024박정희’독자 여러분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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